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84) 남북전쟁 이후의 정치적 혼돈⑤

2015-12-24 (목)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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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종전 후에 존슨 대통령의 출신주인 테네시 주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국회에 나타나자 국회는 이들의 의원자격을 인정하지않고 등원을 거부하였다. 만일 새 주들의 남부의원들이 등원해서 민주당 의원들과 합작할 경우에는 공화당은 소수당으로 밀리게 되어 있었다.

공화당이 이와같은 사태가 일어나는것을 허용할 가 없었다. 드디어 공화당 온건주의 의원들이 급과파 의원들과 같이 단결하여 새 남부주들이 합법적인 주들이 아니라고 결의하고 새 의원 당선자들은 의원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산업재건, 철도재건설, 흑인인권의보호” 등의 공화당의 전후 대남부정책을 관철시켜야만 했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새 남부주들이 설혹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구성되었을 지라도 대통령에게 는 새 정부수립에 관한 지시를 내릴 전권이 애당초 없는 것이고 국회만이 새남부 주정부 수립에 관한 결정을 내릴수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드디어 국회는 새남부정책들을 입법하기 위하여 “재건위원회” (Committee of Reconstruction) 를 신설하였는데 이 위원회는 상하원의원 15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 로써 위원장은 하원의 급과파 지도자인 Thaddeus Stevens 하원의원이 맡았다. 재건위원회가 급과파 의원들로만 구성된것은 아니었으나 이 위원회는 긴박한 몇 가지의 법률이 제정되도록 하였다. 1. Freed Men’s Bureau 연장법, 2. 흑인인권보호에 관한법 (민권법), 3. 미국시민의 인권보호를 위한 헌법개정 등이었다.

1. Freed Men’s Bureau
Freed Men’s Bureau 는 Lincoln 대통령 암살 6주전에 신설된 연방정부 기관인데 종전후에 전쟁 피난민들이 다시 남부농장에 재정착하도록 돕는것과 새로 해방된 흑인노예들 (Freed Men) 의 생업정착을 돕기 위하여 생겼다. 재건위원회는 Freed Men’s Bureau 의 활동영역과 존치기간을 연장할 필요를 느꼈다.

이미 Freed Men’s Bureau 는 흑백난민들에게 백만인분 이상의 식사를 제공하였고 병원들을 지어서 50만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수천명의 백인농장주들을 다시 농장에 정착하도록 하였고, 흑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었으며, 남부주들이 새로 제정한 “흑인통치법” 으로 부터 흑인들의 인권보호를 받도록 해주었다.

또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흑인학교들을 세우고 교사들을 채용하고, 25만명의 흑인 소학생들이 학교에 보내졌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교육을 시작하였다. Bureau 는 Howard University, Hampton Institute, Atlanta University, Fisk University 등 흑인들을 위하여 설립된 대학교 들을 지원하였다.

재건위원회의 온건주의자들은 존슨 대통령이 이 법률에 서명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이 법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연방군법재판에 의해서 해결하도록 규정한 것이 부적당하고 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연방정부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이 법을 1866년 2월에 거부하였다.

한술 더 떠서 존슨은 국회가 남부에서 선출된 새의원들이 참석하기 전에는 대남부정책 입법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존슨의 이와같은 태도는 의원들을 분개하게 만들었으나 공화당은 아직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 (over-ride) 시킬 표 수가 모자랐다. 위원회는 국회가 남부주의 자격을 인정하기 전에는 남부주출신 의원당선자들은 국회에 등원하지 못한다고 결의하였다.

2. 흑인인권보호에 관한 법 (민권법)
새 민권법은 연방정부가 모든 주안에서 미국시민들의 인권을 보호할수 있는 법률이 었다. 남부출신으로 독립적인 주권주의를 신봉하던 존슨 대통령은 이 법률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공화당 급과파 의원들을 비난하였다. 존슨 대통령과 극도로 대립하게된 온건파 의원들이 급과파 의원들과 합세하여 이 법안을 재통과 시킴으로써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시키고 법률로 만들었다.


국회는 기왕에 나선김에 Freed Men’s Bureau 도 역활을 넓히고 존치기간도 연장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존슨 대통령이 다시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 법을 재통과 시킴으로써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시키고 법률로 확정시켜 버렸다. 대통령과 국회의 정면대립이 아주 심각해진 상황에서 국회는 미국헌법14개정을 통과시켰다.

제14헌법개정 (14th Amendment) 에는 존슨 대통령이 그전의 법률들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거부권을 행사해 오던것들을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었다. 1. “미국시민” 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모든 주가 시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으며 2. 모든 남자시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주들은 국회의원의 숫자가 줄어들게되며 3. 모든 주는 남북전쟁 중에 발생한 주의 채무를 갚아서는 안 되며 4. 과거에 연방이나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했던 사람으로써 남부를 지지한 사람은 국회의 3분의 2 결의로써 사면을 받지 않는 한 앞으로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등을 명시하였다.

이 헌법제14개정은 말하자면 반역과 배신을 거듭하고 있는 남부주들의 종전후의 망동에 대한 강한 경고와 최후통첩장 이었다. 개정은 존슨 대통령에게 공화당 주도하의 국회가 준 정치적인 최후통첩장 이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던 일은 존슨 의 출신주였던 네시 주는 제14헌법 개정을 즉각 통과시켜서 상원과 하원의원들을 국회에 보낼 수 있었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타의 남부 주들은 존슨 대통령의 주도아래 제14헌법개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제는 공화당과 존슨 대통령은 정면충돌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었다.

존슨 대통령은 1866년 가을에 있었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낙선시킬 목적으로 민주당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을 규합하여 신당을 창당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는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선거때 선거유세를 하고 다녔다. 그는 연설도중 청중이 야유를 하면 그사람과 설전을 벌리기도 하였었다. 미 민들은 존슨 대통령의 “전례도 없고 대통령답지 못한” 행보에 심한 충격을 받았었고 존슨의 선거운동은 역작용을 하였다. 선거는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나서 공화당 급과파의 세력이 훨씬 더 강해졌다.

1866년 12월에 소집된 새 국회는 새롭고 더 과격적인 남부통치정책을 수립했다. 국회의 새정책들에는 남부에 대한 복수심, 장래에 대한 이상, 정치적 기회주의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회의 특별재건위원회는 남부가 북부에 의해서 점령된 것임을 분명하게 남부에게 확신시켜야된다고 생각하였다.

특별재건위원회는 테네시 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주들을 다섯개의 군사지역으로 분활하여 북부군 장성들이 각 군사지역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급과파의 재건정책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새 남부의 통치정책 중에는 노예해방이나 흑인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제14개정 등의 정당하고 중요한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기타의 정책들중에는 남부의 정권을 공화당이 계속 장악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한 가지 예로 전남부정부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투표권과 참정권을 박탈하여서 공화당의 하수인들이 계속 집권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국회가 완전히 공화당 급과파들에게 장악된것은 아니었다.

Stevens 하원의원같은 일부 급과파들은 남부농장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전노예들에게 땅 40 acres 씩을 자그마한 오두막집과 함께 나누어 주자고 주장하였으나 국회의 동의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결과 종전 후 전노예들은 사실상 농토를 분배받지 못하였으며 대부분 농장 노동자로 계속 일하게 되었다.

존슨 대통령은 새국회의 새 남부정책법들에 계속 거부권을 행사하였으나 국회는 그때마다 압도적인 다수표로 대통령 거부권을 무효화 시켜버렸다. 남부주들은 존슨 대통령의 무기력함에 경악하였고 앞으로 문맹흑인들에 의하여 남부가 통치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남부의 군정장관들은 남부주들이 새 주헌법을 제정하기위한 제헌의회선거를 관리하였는데 피부의 색깔에 구분 없이 모든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반면, 전남부정부 참여자들을 완전히 제거하였으므로 대부분의 남부유지들은 거의 다 제거되버린 것이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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