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권태진의 아프리카 여행기⑰

2015-11-27 (금) <권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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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젊은이들에 감명

권태진의 아프리카 여행기⑰
남아공은 11개 언어 공식 사용하며 3곳의 수도로 나뉘어져
아프리카 유일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이자 범죄율 높은 나라
어려움 속에서 꿋꿋하게 사역하는 선교사들 만나 큰 기쁨

남아프리카공화국 (The Republic of South Africa)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모든 아프리카 국가와 같이 다수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 언어가 하나가 아니며 11개 언어가 공식 언어다. 영어도 그 중에 하나로 공적으로는 영어를 사용한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끼고 있고 있으며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의 경치가 우수하다. 국토의 넓이는 남북한의 5배에 가깝다.

2014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5천4백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국가의 수도가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있는 행정수도가 3백만 이상이 사는 페트로리아, 입법부는 케이프타운, 그리고 사법부수도는 불로엠폰틴이다. 그러나 제일 큰 도시는 요하네스버그로 2011년 조사에 의하면 시 인구 4백70만, 매트로가 8백만 이였다. 백인들은 아직도 해외로 도피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 이유는 흑인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 백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하더라고 1천만명 정도의 백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4백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과거의 지배계급 이였던 백인들이 직금은 사회전반에 걸쳐 지배를 받고 있다. 대부분 교육받고 부유한 사람들이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남아공은 세계은행에 의하면 세계에서 중상위 소득 국가로 개발국가의 하나로 부상했다. 그러나 남아공은 과거에 인종분리정책(apartheid)으로 악명을 가진 나라였다. 1948년 인종분리정책을 채택하여 1994년 까지 국민의 대다수인 흑인들이 투표권이 없었다. 소수인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향유했으며 이것은 서방부유국가들의 국민이 누리는 생활을 하였던 것과는 달리 흑인들은 수입, 교육, 주택 등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수준이하의 대우를 받아왔다.

백인 집권당은 1990년부터 인종차별에 대한 정책을 철패하고 인종차별정책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려 27년 동안 교도소에 갇혀있었던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였다.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넬슨 만델라는 첫 임기 5년이 끝나자 헌법에 보장된 재선의 길을 택하지 않고 깨끗이 물러난 선례를 보였다. 그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금세기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은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다. 아프리카에서는 법질서와 인권에 대하여 좋은 평을 받고 있으나 항의대모가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고 살인사건 등 범죄가 빈번하다. 금년 5월에도 요하네스버그 중심지에서 외국인 추방 폭력을 벌려 외국인들을 살해하고 사업체를 방화하여 큰 소요가 일어났던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요하네스버그 에서 숙소를 정하려던 것을 대신 푸레토리아에서 호텔에 투숙했다.

남아공으로 들어서니 국가 간 빈부의 차이를 도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보츠와나 하이웨이는 포장이 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츠와나를 지나 남아공 으로 들어오니 하이왜이는 포장이 더욱 잘 되어있다. 보츠와나 국경을 넘어 남아공으로 들어오면서 자연 경치도 달라졌다. 낮은 산들과 푸른 언덕이 있어 경치도 좋았다. 국경을 넘어 오는 도중에 사파리 공원 사인도 보였다. 남아공에는 사파리 공원이 여러 곳에 있다. Cruger 국립공원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사파리공원의 하나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보츠와나를 출발한지 5시간 가까이 지나 오후 2시가 되었다. 맥도날드 식당에 도달한 곳이 루스텐버그 (Rustenburg)시 외각 고속도로 변이였다. 나는 맥도날드의 대표적 메뉴인 소고기 빅멕과 후렌치후라이를 주문했다. 햄버거 한 겹자리 적은 빅멕인데 그 크기가 미국의 두 겹자리 보다 더 고기가 많고 고기 맛은 더욱 우수하다. 아마도 소고기가 풍부하고 더욱이 신선한 고기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루스텐버근는 10만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부유한 도시로 남아공에서 백인이 많은 곳이다. 2010년에는 월드컵 축구가 이곳에서 개최된 광산촌이다. 특히 플래티늄(platinum) 금속 생산은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세계에서 제일 큰 두 개의 플래티늄 광산과 역시 세계에서 제일 큰 플래티늄 정제소인 refinery가 있다. 고속도로 주위의 넓은 벌판에 플래티늄을 채광한 흙들이 여기저기 큰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요하네스버그로 향하는 고속도로 변에 철조망으로 울타리가 쳐있는 광대한 대 초원지대가 있다. 자동차로 몇 분을 지나도 끝이 나지 않는 이 땅의 주인이 현직 대통령의 땅이라고 이목사는 말했다. 이 거대한 땅이 한사람의 소유, 특히 현직 대통령의 땅이라 생각하니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가 탄 차는 아프리카 최대도시 요하네스버그를 통과하여 행정수도 프레토리아에 있는 정인명목사 댁에 도착한 것은 보츠와나 출발한지 7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이었다. 수위실이 있는 소위 게이트 커뮤니티에 렌트한 집이다. 남아공에 시큐리티가 잘되지 않은 점을 생각할 때 수위실이 있는 곳에 사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목사부부와 역시 이곳에서 선교사로 있는 백시학 목사 부부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지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선교사 생활에 몸이 배어 있어 인지 정목사 부부의 친절과 배려의 모습이 눈에 드러나 보인다.

54세의 정목사는 독일에서 이미 10년 선교를 했으며 아프리카로 옮긴지 13년이 되었다. 30대 초 일찍 선교에 몸을 담은 정목사는 현제 남아공과 짐바웨에 현지인교회건물을 세워주는 선교를 하고 있다. 두 나라에 이미 10여개의 교회를 세워 주었으며 짐바웨에 신학교를 세워 현제 60여명의 신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슬하에 금년에 대학을 졸업한 딸과 고등하교 재학 중인 아들을 두고 있다.

금년 67세인 백시학 목사는 8년 전에 선교사로 이곳에 왔다. 농장사역이 그의 사역이다. 최근 한 부족추장으로부터 100만평의 땅을 50년간 목장으로 무상으로 쓰도록 임대했다고 기뻐했다. 300두 이상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땅이라고 한다. 농장 사역이 경제적 이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농장을 통하여 원주민을 고용하고, 교육하고 기술을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원주민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백목사의 출가한 세 자녀들은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살고 있다.

정목사에 의하면 남아공에 4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있다. 요하네스버그, 푸레토리아, 케이프타운 등 대도시에 2-3개의 한인교회가 있으며 선교사 가정이 120여 세대가 있다. 대사관, NGO, 대기업 지사들이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한국의 KOICA가 나와 있으나 보츠와나와 남아공처럼 개발도상국에는 파견되어있지 않다.

정목사내외는 댁에서 머물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다음날 일찍 귀국해야 하기 때문에 공항부근에서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이목사 내외와 백목사 내외와 작별 인사를 하고 정목사부부와 함께 시내 구경도 하고 숙소도 정할 겸 집을 나왔다. 요하네스버그 시내구경은 아직도 험악한 사태라 대신 푸레토리아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출퇴근 시간이라 도로가 자동차로 혼잡하다. 이곳의 자동차들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새 차들이 많으며 벤츠, BMW등 고급차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지나온 5개국과는 엄청난 차이다.

시내를 통과하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에 차를 세웠다. 남아공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인 유니온 빌딩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선 곳 위에는 대통령궁과 행정부청사들이 있으며 아래에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들이 있는 공원이 있다.
유니온 빌딩이 가장 잘 보이는 공원 중앙에 넬슨만델라 동상이 서 있다. 높이가 무려 9미터가 된다. 정목사 사모가 “이 동상 때문에 유니온빌딩이 모양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김일성 동상같이 너무 커 기분이 안 좋아요”하고 말한다. 밑에서 유니온 빌딩을 보자면 동상 때문에 유니온 건물모습이 다소 막혀 정목사 사모의 말에 동감이 갔다.

남아공의 한국전 참전
나는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의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으로 알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를 조사하다보니 그렇게 기록되어있었다. 남아공에 와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규모는 아니지만 공군2개 편대가 한국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243명의 공군장교와 545명의 공군사병, 38명의 육군을 포함 총 826명이 참전했다. 우리가 서 있는 유니온 건물 공원 벽에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당한 병사들의 이름을 세긴 동판이 붙어있다. 28명의 전사자와 8명의 실종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날이 어두워 져 요하네스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내에 있는 시티랏지 호텔에 도착하니 수백 개의 방이 모두 매진되었다. 다행히 직원이 공항에서 좀 떨어진 동일 계통의 호텔로 예약을 하여 주었다. 정목사부부와 해어진 후 호텔차로 다른 호텔로 갔다. 방이 많지 않은 작은 호텔이지만 깨끗하고 더운 물도 충분히 나와 며칠 만에 샤워를 할 수 있었다.
호텔라비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숲과 빵으로 저녁을 하면서 아내에게 다음날 도착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6월 25일 목요일 (귀국)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10시에 호텔 차로 요하네스버그 공항으로 향했다. 오후 1시 50분 출발하는 아랍에메리트 두바이 행 에메리트항공에 올랐다. 8시간 5분 비행하여 두바이에 도착한 시간은 밤11시 59분(남아공보다 2시간 앞섬)이었다. 이곳에서 뉴욕 행 비행기로 바꿔 타야하는데 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야밤이라 공항의 의자나 바닥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다. 1978-9년경으로 기억이 된다. 미국에 이민 온 후 최초 해외여행으로 아내와 이태리 베니스에 갔을 때 일이다. 성마가성당 앞에 있는 호텔에서 세벽 4시경에 잠이 깨어 호텔에서 나와 혼자 성당광장으로 나갔다. 광장구석구석에 젊은 여행객들이 자고 있었다. 일본청년들로 보인 4-5명의 젊은이들이 잠은 자지 않고 기타를 치며 밤을 지세고 있었다. 그 때의 젊은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리에서 살아지지 않고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공항에 기도실 표시가 있어 들어가 보니 무슬림을 위한 기도실이다. 무슬림기도실에는 언제나 수도가 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손, 발, 머리를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10여명의 무슬림교도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나도 한구석에 앉아 무릎을 꿇고 묵상하고 있었다. 미국에도 기도실이 있는 공항이 있다. 케네디공항 터미널 5에는 개신교, 카톨릭, 무슬림 교인들을 위한 기도실이 각각 마련되어있다.

새벽 2시50분 에메리트 A380 거대한 항공기는 뉴욕을 향하여 출발했다. 6,844마일 13시간 27분 거리다. 옆 좌석에는 몸집이 큰 60대로 보이는 백인남자가 앉았다. 남아공 사람으로 두 아들과 그중 한 아들의 약혼자와 함께 뉴욕을 비롯 1개월 동안 미국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라도 했다. 그는 남아공의 한 대학에서 박사과정 메네이져라고 소개를 했다.

내가 먼저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많이 이주를 했다고 들었는데”하고 말을 걸었다. “지금도 백인들이 나가고 있다. 흑인대통령이 들어오면서 백인에 대한 차별이 대단하다. 곧 완전 흑인의 나라로 될 것이다. 자신은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떠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검은 대륙에 백인이 침범하여 오랫동안 식민지 통치를 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백인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산 사람들이다. 그러나 남아공은 백인지배 하에서 오늘과 같은 발전을 하였으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이룩한 부와 문화를 지금 누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남아공을 출발하여 24시간 이상이 지나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나에게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벼운 포옹을 했다. 45년을 함께 한 아내가 오늘 따라 더욱 귀하게 여겨졌다.

끝맺는 말 (Epilog):
유럽연합과 미국 등 구미 선진국의 영향권에 있던 아프리카가 변모하고 있다. 석
유. 광물자원 등에 대한 글로벌 수요 증가에 따라 중국, 인도, 일본 등 자원 소비대국들이 앞 다퉈 아프리카로 진출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중국의 진출이 뚜렷하다. 한국도 이들 국가처럼 아프리카 진출이 확대되었으면 하는 희망이지만 이들과 경쟁하기는 역 부족이다. 그러나 선교사, 코이카, 엔지오 등을 파견하여 한국을 심는 좋은 발판이 되어 온 것을 볼 수 있어 마음이 기뻤다.

선교사 자녀들 중에서 아프리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최재선 선교사의 두 딸, 큰 딸은 미국대학원에서 아프리카 아동문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다. 금년에 영국 켐브릿지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학위를 받은 후 아프리카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역시 미국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둘째 딸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다. 탄자니아에서 시카고에 유학 온 한국 청년을 만나 결혼하고 아프리카로 온 미국 백인 여성이 있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일하면서 금년에 조지아 에모리 대학에서 보건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졸업 후 보건위생이 빈약한 아프리카를 위해 평생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이 여성은 다레살렘에서 이틀 동안 숙박했던 인트코 숙박소 이해명 사장의 며느리다.

잠비아 치소모 병원 사무장을 맡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 유리씨를 만났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알바니에서 유학중 아프리카청년을 만나 결혼 후 아프리카로 왔다. 이들은 모두가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아프리카를 위해 헌신하는 젊은이들이다.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아프리카를 보고 느끼고 체험을 통하여 아프리카를 배우려는 것이 여행의 주목적이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사는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보게 된 것은 이번 여행의 중요한 경험이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역하는 여러 선교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역을 목격하게 된 것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끝>

<<권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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