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78)/남북전쟁 (Civil War ) ⑩

2015-11-13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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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78)/남북전쟁 (Civil War ) ⑩

KKK (Ku Klux Klan)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께서는 한국에서도 미국의KKK단과 그들의 망동에 에 관한 기사를 읽으신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에 온지 오래된 동포들도 KKK의 진상과 역사적인 유래를 잘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KKK 는 남북전쟁의 종결과 함께 생겨났으며 미국역사에 큰 흉터를 남긴 미국의 수치스러운 한 단면이다. KKK 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어려운 역사얘기를 타자지 두 장 길이로 써 보고자 한다.

KKK의 Ku Klux 는 Kyklos 라는 희랍어가 어원인데 서클( circle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구태여 희랍어를 썼던 이유는 정체불명의 이 단체의 이름이 그럴싸하게 들리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KKK의 창설목적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었던 탓이었는 지도 모른다. 이 정체불명의 조직이 미국역사에 남긴 오점은 엄청나고 아직까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무기를 쓰는 전쟁은 끝났지만 정치적 전쟁은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노예제도가법적으로는 끝났지만 사실상의 노예들은 계속 존속해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 미국역사를 한번 다 훑어본 후에 KKK 를 다시 들추어 보아야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KKK 의 악행을 얘기할때 항상 쓰이는 단어가‘lynch, lynching’라는 단어들인데, 그 어원은 버지니아 주의 어느 도시에서 지방사법관리로 흑인들에게 잔인한 폭행을 한 William Lynch 인지 Charles Lynch 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미 남부에서 1835년경부터 백인군중들이 불법이거나 인민재판식으로 판결한 후 주로 흑인들을 목을 매달거나 기타의 잔인한 방법으로 불법적으로 살해하던 행위를 lynching 이라고 불렀다. 1870년경에는 흑인으로 주나 연방의원들로 당선된 사람들의 10 %가 lynching 을 당했다고 한다. 1871년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500명의 KKK 폭도들이 형무소를 습격하여 흑인죄수 여덟 명을 lynching 하였다.

KKK는 불가사리처럼 없어져 가는듯하다가 두 번씩 재생하였다. 세개의 KKK 는 직접적인 연대 관계는 없지만 모두가 몇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대에 따라 강조점의 비중은 달랐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백인우월주의, 개신교기독 교인, Anglo-Saxon 주의, 남북전쟁 종전후의 공화당의 남북정책반대, 금주주의, 반노조운동, 반흑인, 반유색인종, neo Nazis, 반천주교, 반유태교, 반이민, cross –burning (십자가 불태우기) 등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대게범죄로 처벌을 받아야할 짓들이 었음으로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깔대기를 꺼꾸로 세운것 같은 흰 모자를 얼굴까지 가려서 쓰고 두루마기같은 흰제복을 입었는데, 더러는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수놓기도 하였다. 신입단원들로 부터는 입단비와 제복비를 받아서 KKK 의 활동비로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당같은 기관처럼 전국적인 조직이나 성문규율 같은 것은 없었던 듯하고 기록 등도 분명치 않아 정확히 몇 명이나 누구가 KKK 단원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남부, 중서부, 서부 등 여러 곳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하류층의 백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산이 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더러는 한지역의 유지들인 변호사, 의사, 성직자, 판검사, 경찰서장, 시장과 배심원들까지 KKK 단원으로써 증인을 구하기도 힘들었으며 범인을 체포 하거나 처벌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게 KKK 의 대대적인 단속은 연방법을 적용해서 하였다. 가끔은 KKK 가 정당처럼 활동하기도 하여서 선거직 공직자들을 뽑기도 하였으며 몇 군데의 주지사도 뽑았다고도 한다. KKK 의 지지도 받았던 민주당은 1876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남부주의 정권을 잡았다.

시대에 따라 KKK 선두주창자들의 3분지2가 개신교 목사들이었을적도 있었고 참가 자격이 있던 미국인들 15% 내지 30%의 미국백인들이 참가했던적도 있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끝난 1년 후인 1866년에 테네시 주의 Pulaski 에서 남부의 패전을 이념적 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전 남부군 군인 여섯 명이 KKK 를 조직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이 조직은 남부의 모든 주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를 몸소 체험하였거나 그때의 기록을 본 분들은 6.25 사상자들의 상당한 숫자가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이 아니라 전쟁 중 점령군이 바뀔 적마다 사상의 차이나 개인 사감정 때문에 잘 아는 고향사람들끼리 서로 죽인사람들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1865년 끝난 남북전쟁도 미국에 이와 비슷한 여진을 남겼다.

패전한 남부사람들은 천지분간을 못하고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전흑인노예들, 북부에 부화뇌동하여 아첨하고 날뛰는 일부의 남부백인들 (Scalawag), 무일푼으로 내려와서 한몫도 보고 정치에도 개입하려드는 북부백인들 (Carpetbagger)등의 꼴을 볼 수가 없었다. “한손 봐줘야 쓰겄땅께로!”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Gone with the wind” 소설 에는 초기 KKK들이 마치 의혈단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제2차 KKK 의 활동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인근에서 1915년에 시작되었다. 제1차 KKK 난동을 정당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재활되었고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하는등 불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무렵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적 산업성장이 활발해지고 새 이민홍수가 나고 있어서 사회적 격동기를 겪고 있었다.

KKK 가 다시 머리를 처들기 시작하여 이번에는 반천주교, 반유태교, 반이민자, 반노조운동등을 목표로 시가행진, 방화, 살인등 테러리스트 노릇을 하였다. 1920년대에이르러서는전국에 4백만 명의 KKK 단원들이 있었다는데, 1929년에서 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이 10여 년간이나 계속되자 KKK 단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어서 1944년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제3차 KKK 부활은 흑인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졌던 1960년대에 시작되었 는데 이들은 주로 남부에서 흑인교회들과 학교에 폭파, 방화하고 흑인들과 백인인권 운동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하였다. 1965년에는 앨라배마에서 백인여성인권운동자를 살해한 KKK 단원 네명이 체포되자 존슨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KKK 를 규탄하였다. 1970년부터는 KKK의 기세가 줄어들어, 1999년 추산으로 전국에 만 명 정도의 단원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KKK 는 잿더미 속에 묻혀있는 불씨같은 존재들로 사회적 불안이나 변화가 일어나면 또 나쁜 병균처럼 활발해질 수 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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