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74) 남북전쟁 (Civil War ) ⑥

2015-10-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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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30여년 전에 Eisenhower 대통령의 조그마한 농장이 있는 게티스버그를 관광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작은 농촌이었고 Eisenhower 대통령의 집도 전형적인 작은 옛 농가이었다. 게티스버그 전쟁터를 가 보았는데 작은 동산이 사방에 있었고 그 가운데 지금은 마른 밭인 그렇게 넓지않은 들판이 있었다.
 
 그좁은지역에서 Gettysburg 혈전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도록 평화스러워 보이는 들판이었다. 거기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북군국립묘지를 가 보았다. 여름 한낮에 묘지중앙에 있는 도로를 차로 지나가면서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오는것 같은 감상에 젖었었다. 묘비들에는 동부의 각 지역에서 온 십대에서 오십대에 이르는 전사자들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들의 처참한 희생으로 “성공한” 남북전쟁은 과연 성공한 것이었는지?
 
  이 국립묘지의 개막식이 있었던 1863년 11월 19일에 Lincoln 대통령은 그유명한 “Gettysburg Address” 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장병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국민의, 국민을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 는 영원히 쇄멸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연설에서 갈파하였다. 이 유명한 연설의 원고는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DC에서 기차를 타고 게티스버그 국립묘지 개막식에 참석 하려고 가는 도중에 편지봉투의 뒷장에 썻던 것이라고 한다. 272 단어로 약 2분 정도에 끝났다는 이 연설은 그날의 신문에 보도된 것이 있는데 또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이 각각 조금씩 다른 다섯 개의 연설문이 있다고 한다.
 
  서부지역 북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랜트 장군은 1863년 11월말에 테네시 주의 Chattanooga 를 포위하고 있다가 남군을 격퇴시켰다. 이제 북군은 조지아 주 애틀랜타 를 위시로한 남부에 대한 총력전투에 나설 준비가 된 것이었다.
 
 링컨대통령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점차 탁월한 지휘력을 보여온 그랜트 장군을 육군중장으로 진급시키고 북군총사령관에 임명하였는데 중장계급은 그동안 워싱턴 장군만 받았었던 계급이었다고 한다.
 
  동부전선의 전투들은 계속 북부에 불리하도록 진행되고 1864년 7, 8월경에는 11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링컨 대통령이 재선되기 어려울것 이라는 우려조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게한 장군들이 그랜트 장군, Sherman 장군(미육군 Sherman tank 의 원조), Sheridan 장군 (미육군 Sheridan tank 의 원조) 등이었다.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동부지역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아니라 여러곳을 동시 다발적 으로 공격하는 전면공격전투가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남부후방 민간인들의 전쟁지지 의욕을 송두리채 뽑아버릴 초토화 총력전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864년 5월에 그랜트장군은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 에 인접 도시인 피터스버그 를 40일간 공격하였는데 그 기간동안에 북군 5만5천명, 남군 3만명의 사상자들이 나왔다. 비록 남군의 전사상자들의 수효는 북군보다 적었지만 Lee 장군 휘하의 남군들 에게는 거의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준 것이었다.
 
  당시 북군의 서부전선 사령관이었던 Sherman 장군은 Grant 장군의 전투작전과 비슷한 총력동원 초토화 전술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를 점령하고 동부끝에 있는 Savannah 까지를 점령했다. Sherman 장군은 1864년 9월 2일에 애틀랜타 시장에게 “전쟁은 원래 잔인한 것이요. 부드럽게 전투를 할수는 없는 것이요” (War is cruelty and you can not refine it) 라고 말하면서 애틀랜타 전체를 약탈하고 수만 마리의 말과 나귀를 압수하고 거의 모든 시설에 방화하였다. 이와 같은 무자비한 전술은 북군쪽의 입장에서본 것인데 공격을 당한 남부쪽에서본 북군의 공격은 참혹하고 잔인한 불량배들의 행패이었다.
 
 Margaret Mitchell 이 1936년에 써서 Pulitzer 문학상을 받은 “Gone with the Wind”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는 바로 이 Sherman 장군의 공격을 받은 애틀랜타가 이 소설의 시대적, 지역적 배경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아름답지만 다소 비정상적인 애욕은 정말 책을 놓을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이 소설에 쓰여져있지만 남부의 대농장주 귀족을 상징하는 스칼렛은 철저한 인종주의자이며 백인우월주의자이고 노예소유자이다. 스칼렛의 눈에 비춰진 북군들은 강도, 약탈자, 절도자, 방화범들에 불과한 자들이었고 남부의 잘 자리잡힌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도록한” 불한당 Yankee 들이었다.
 
  또한편 버지나아 주의 Shenandoah Valley 에서도 전투용맹성으로 이름이 나서30세가 되기전에 장군이된 북군의 Philip Sheridan 장군도 Sherman 장군과 비슷하게 무자비한 전술을 써서 공장, 농장, 창고 할 것 없이 약탈하거나 방화 하였다. 그는 “보고 통곡할수 있도록 눈들만 남겨두고 다 파괴해 버려라” 라고 명령하였었다 한다.
 
  이러한 무자비한 전투방법은 북쪽이 곳곳에서 전승하게 하였고 Lincoln 대통령은 군인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미합중국 국민들의 민심도 돌아서게 하여서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링컨은 뉴저지, 델라웨어,. 켄터키 주들을 제외한 북부의 모든 주에서 승리하여 선거인단표 212표를 얻어 21표를 얻은 민주당측후보 McClellan 장군을 억누르고 재선되었다.
 
  1864년 12월 10일에 Sherman 장군은 애틀랜타를 출발하여 6만명의 장병을 이끌고 애틀랜타를 공격할때 썼던 것과 똑같은 파괴적 전술로 25일 동안에 Georgia 주의 동부끝 대서양에 이르렀다. Sherman 장군은 Lincoln 대통령에게 “Savannah 시를 탈환하고 150문의 대포, 엄청난 양의 탄약, 2만5천 bale (1 bale 은 480 파운드의 씨를 제거한 솜) 의 면화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획득하였읍니다” 라고 12월 25일에 전신으로 보고하였다.
 
 Sherman 장군은 1860년 12월에 미합중국을 제일 먼저 탈퇴하고 남북전쟁 시작의 첫 대포를 쏘기 시작했던 사우스 캘리포니아 주로 1865년 1월 16일에 북진해 올라갔다. 사우스 캘리포니아의 수도 컬럼비아 시와 기타의 도시들도 애틀랜타 처럼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 1865년 3월말에 Grant 장군은 그때까지10개월동안 포위한채로 공격을 해오고 있던 버지니아주의 피터스버그를 다시 맹공격하기 시작해서 1865년 4월 2일에 피터스버그가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바로 인접도시인 남부 CSA 의 수도 리치몬드에서 남부의 Davis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이 도주하였다. 그 이틋날인 4월 3일에 북군이 리치몬드 에 입성하였고 Lee 장군은 얼마남지 않은 잔여 병역을 이끌고 남부측의 Johnston 장군이 북군과 싸우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북군의 Sheridan 장군의 저지를 받아서 부대이동이 좌절되었다. Grant 장군은4월7일에 Lee 장군에게 “장군, 지난 주간의 전투결과를 보아서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아셨겠지요!” 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Lee 장군은 계속해서 항전할 방도를 끝까지 강구하여 보았으나 승산이 없음을 알게되었고 그의 수하장군들도 한사람을 빼고는 모두 북군에게 항복하기를 원하였다. 하루이틀간 항복조건에 대한 의사교환이 더 있었다. 드디어 1865년 4월 9일 오후에 버지니아 주의 중부에 있는 Appomattox Court House 라는 촌락에 있는 Grant 장군의 야전본부에 부관 한명만 대동한 Lee 장군이 깨끗한 정복에 의전용 군도를 차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Grant 장군은 평소에도 복장이 단정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아오던 사람이었는데 이날도 야전복 차림에 칼도 차지않은 채 나타났다.
 
 웨스트포인트의선후배 관계인 두장군은 아주 정중하고 예의바른 대화와 행동을 했다. 두사람은 20년전의 멕시코 전투에 같이 참전했던 옛 얘기들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항복의 조건을 묻는 Lee 장군에게 Grant 장군은 아주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중 특기할만한 점들중에는 흔히 항복의 상징으로 당하는 무장해제 대신에 남군의 장교들이 군인 명예의 상징인 군도를 가지고 집에 가도록 허용하였으며 고향에 돌아가는 남군장병 들이 쓰고있던 개인소유의 말들을 농사용에 쓰게하기 위하여 가져가도록 허용하였다. 또 굶주리고 있는 남군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Lee 장군은 Grant 장군의 아량과 관대함에 감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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