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용서 (최효섭 / 아동문학가·목사)

2015-09-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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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끝내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일본의 잘못된 행동이 역사상 확실한데도 “이미 사과를 한 건이니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독일은 새 총리가 부임할 때마다 유대인 학살을 사과하고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다시 홀로코스트를 사과한다. 사과는 한 번으로 족한 것도 아니며 거듭한다고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나도 너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겸손의 표현이다. 교만한 자는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너보다 잘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서란 지난 일을 덮거나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실수를 더 좋은 새 출발의 계기로 삼자는 건설적인 사랑이 용서이다.


역사 발전은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다리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자기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한 번 꼬이면 펴기 힘들다’는 별로 좋지 않은 말을 들어왔다. 증오나 복수심, ‘두고 보자’ 하는 따위의 무거운 마음의 짐은 결국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최선의 복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용서이다. 세상의 싸움은 때려 눕힌 자가 이간다. 그러나 성경은 얻어맞은 자가 이긴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용서를 전제로 한 말이다. 자기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용서라는 약으로만 치료될 수 있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마음의 상처는 치료되지 않는다. 원수를 갚는 자는 그 원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원수를 선대하는 자는 확실히 그 원수보다 나은 인간이다.

용서의 3대 원칙이 있다. ‘이해하고,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하다. 깨끗이 잊을 수 있는 자는 더욱 훌륭하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었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자는 더더욱 훌륭하다.

십자가의 언어는 용서이다.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용서이다. 영어의 용서(forgive)를 웹스터 사전은 ‘주장을 포기하는 것(to give up a claim)’ 이라고 해석하였다. 내가 마땅히 비난하고 정죄하고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용서이다. 할 말 다 하고 나서 용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용감한 사람이 용서 할 수 있고 비겁한 자일수록 용서를 모른다. 용기란 자기를 내어주는 투자를 말하므로 용서도 자기를 내어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는 용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다.

예배드릴 때 내 마음속에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예배는 무효라고 예수는 단언하였다. 기도는 신의 용서와 받아주심을 비는 것인데, 자기는 용서하지 않고 용서 받을 생각을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와이드너 대학 심리학 교수 할 쇼리 박사가 발표한 ‘용서의 5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기다리는 것이다. 피차의 대화가 가능할 때까지 기다려라. 둘째 단계는 ‘내가 옳다’는 속마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이 단계에 올 때까지 자질구레한 대화는 피하라. 셋째 단계는 상대에 대하여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점을 말로 표현하라. 넷째 단계는 자기를 방위하려는 마음을 가라앉혀라. 다섯째 상황을 받아들일 만큼 내 마음이 편해지면 그 때가 용서의 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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