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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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김남수 프라미스 교회 담임목사

2015-09-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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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외형적 성장보다 어린이 선교로 내실 다져야”

▶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회장

2008년부터 시작한 4/14윈도우 운동 어느정도 궤도
40년간 목회하며 어려울 때마다 “나는 죽었다”각오로 임해

프라미스 교회 김남수 목사가 10년 전부터 세계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40년 목회생활 중 가슴아픈 일도 많이 겪었다. 그를 만났다.

▲4/14 윈도우 운동
프라미스 교회 김남수 목사는 요즘 전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바로 전세계 18억5,000만의 어린이를 살리자는 4/14 윈도우(window) 운동이다.


“1995/96년 미국기독교단 ‘하나님의 성회’ 지도부를 안내하여 북경에서 곡식을 싣고 평양으로 가보니 탁아소 아동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주체사상을 완벽하게 조기교육 받고 일생을 살게 되어 있었다. 기독교는 뭘 했나하는 반성이 왔다. 공산주의뿐 아니라 이슬람교, 유대교, 일본천황교 모두 어려서부터 종교에 접하게 한다. 기독교는 어른 목회, 새 건물에 대형 프로젝트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때 그는 전략적 의미의 어린이 선교를 떠올린 것이다.

“4~14세 아이들에게 예수를 전하면 85%가 믿는다. 기독교 역사에 대해 충분히 독학하여 이론을 세운 다음 일단 실습을 했다. 2008년 남미 온두라스에 땅을 사서 학교를 세우고 길거리 아이들 500명을 모집했다. 유니폼에 가방, 신발을 신기고 왜 사는 지, 하나님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를 교육했다. 1년 후 아이들은 너무나 달라졌다.”확신을 가진 그는 4/14윈도우 운동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세계적인 기독교 선교네트워커인 루이스 부시 목사를 만났다. 그는 1989년 로쟌대회에서 10/40 윈도우 운동을 시작한 이다. 북위 10도부터 40도까지 기독교인이 적어 전도대상이 많은 지역으로 보고 20년간 전세계 네트웍을 구축했다. 세계변혁의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던 차에 김남수 목사의 ‘4/14 윈도우 운동’에 깊이 공감한 루이스 부시 목사는 힘을 합치게 되었다.

2009년 드디어 제1회 4/14 윈도우 컨퍼런스가 열리고 전세계 64개국 387명이 참가하여 어린이선교에 대해 논의했다. 싱가폴, 서울, 태국, 뉴욕 등 장소를 옮겨가며 매해 참가자 수가 늘어났다 2014년 프라미스 교회에서 7박8일 열린 뉴욕컨퍼런스에는 82개국 1,000명이 참가했다. 5회에 걸친 총 131개국 3,447명이 어린이 비전을 가슴에 담아 돌아갔다. 올해에는 지역별로 열리며 내년에 열리는 한국 컨퍼런스에는 3,000명 참가가 예상된다고 한다.

▲“우는 교회” 소문나다
김남수 목사, 그는 1974년 처음 미국에 왔다.
“LA에 왔다가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뉴욕 구경을 왔다. 당시 1921년 뉴욕한인교회, 1963년 뉴욕한인중앙교회, 1969년 퀸즈한인교회, 1971년 브롱스한인교회, 74년 스태튼 아일랜드 교회 등 다섯 곳이 창립되어 있었다.

뉴저지 지역에서는 1967년 뉴저지한인교회, 1971년 제일한인교회, 1972년 뉴저지 장로교회(이전후 74년 퀸즈장로교회)세 곳이 있었다. 여기도 뜨겁고 열정적인 오순절 교회가 있어야겠다 싶었다. 1974년 5월 맨하탄 33가 미국예배당을 빌려 교인 7~8명, 몇 가정이 예배를 테이프로 드리기 시작하면서 순복음뉴욕교회는 태동되었다. 나는 미국 선교사와의 약속 때문에 4개월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간 그는 월남에 중앙선교교회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75년 월남패망 2주전, 미국 군용기를 타고 만삭의 아내, 딸 세식구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태국으로 간 지 5일만에 아들을 낳았다.


다시 독일 개척교회로 간 김남수 목사는 2년반동안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국생활에 대한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어루만져준다. 맨하탄의 교회는 제1대 김성광 목사에 이어 제2대 담임목사로 독일의 김남수 목사가 초청되면서 “우는 교회”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예수를 안믿는 사람도 교회 계단을 오르면서 울기 시작하며 예수님을 찾았다. 점점 우는 교회 구경 가보자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인들이 200명에서 1,200명으로, 하루 네 번 예배를 보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2,000명이 넘어서자 1991년 현재 플러싱 31애비뉴로 옮겼다.”

현재 뉴욕 교인 5,000명, 뉴저지와 맨하탄과 애틀란타 4곳의 예배 처소를 공유하고 있으며 프라미스 교회 소유 맨하탄 91가 건물안에 온누리 인 투(in 2)교회도 150명 교인이 1,000명으로 늘어났다. 지난 40년간 단 한차례의 분열 없이 건강하게 성장해온 프라미스 교회다.

“교회가 크면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속이 터지는 일도 많았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들 교회에 이익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딱 두가지를 보았다. 50명의 장로를 비롯 온 교우들이 한마음이 되어 교회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화평을 유지해 왔다.”

2005년 순복음뉴욕교회 이름을 차세대의 세계선교를 위해 프라미스 교회(Promise Church, 하나님의 약속)로 바꾸었고 2012년 뉴저지 프라미스 교회와 병합했다.

▲절망의 순간 십자가가...
김남수는 1944년 강원도 철원에서 2남6녀의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김포쪽 넓은 땅을 소유하고 농사를 짓던 할머니는 유명한 무당이었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면 사람이 바뀌더라’며 그의 등을 조용히 밀었다. 덕분에 그는 수많은 강능 김씨 중 유일하게 어린 시절을 교회에서 보내며 자랐다.

김남수는 군대에 다녀온 후 건축업을 하다가 망해버리자 죽으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그만 버스를 잘못 타서 내린 곳이 서대문 순복음교회였다. 십자가를 따라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 바닥에 엎어져 기도하자 통곡이 터져 나오며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성령의 불덩이가 벼락 치듯 떨어져내려 6개월간 울면서 기도했다”

순복음신학교(한세대학 전신)를 졸업했고 선교사가 되어 1970년 충북 음성으로 내려갔다. 전기도 없고 차도 안다니는 곳의 흙벽돌로 지어진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너무 배가 고팠다.

3년간 개척교회 생활을 하던 중 서울에서 세계오순절 대회가 열려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이 올라가서 봉사활동을 해야 했다. 그의 친절한 가이드에 감동한 미국 흑인 목회자는 미국 길을 열어주었다. 현재 김남수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의 실행위원으로, 세계 7,000만의 교세를 지난 교단의 세계 실행위원으로 한국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고난의 시기에 단 한명도 묻지 않아
“40년간 목회 하면서 여러 힘든 일이 있었다. 첫째는 신학교때 만나 결혼한 아내가 폐결핵으로 8개월간 광주기독병원 무료결핵 병동에 있었다. 결핵성 골수염에 온갖 질병으로 10년간 투병했다.

둘째는 아들이 14세때 사고를 쳐서 투옥된 일도 있다. 눈물로 기도하고 시간과 마음, 정성을 보여주자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2년제 대학을 나오고 모범수로 출감후 뉴저지 주립대학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현재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뉴욕주 정부 인정 초중등학교인 크리스천사립학교 교장으로 학교를 날로 부흥시키며 문제 있는 아이들을 잘 케어하고 있다.

아이들의 이런저런 고난을 겪으며 나는 없다. 명예도 이름도 없다, 이 모든 위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나라만 위해 일한다. 당시 한인언론마다 매일 김목사 비방 기사를 써도 몇천명 교인들 중 단 한명도 목사님, 애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마웠다.”

개척교회를 일구면서 밤낮 목회를 하다 보니 가정사에 탈이 생겼고 그는 교회에 험집이 날 까 사표를 냈다.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이 목숨을 걸고 교회를 살려야 한다고 말렸다. 결국 그는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목회를 했다.’ 고 한다.

한편 김남수 목사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6대회장으로 사무실을 교회 안에 두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위대한 건국대통령이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이승만대통령이 평가절하되었다. 국가관이 확실한 기독교인들은 큰일을 할 수 있다. 역사의식을 지닌 교회는 더 큰 일을 한다. ”

올 연말이면 프라미스 교회는 창립 40주년이 된다. 하는 일이 많다보니 바쁘지만 시간이 나면 1주일에 세번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김남수 목사.

“65세부터 은퇴 준비를 해왔고 근년에는 교회가 후임자를 내정해 주로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선교에 대한 일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는 그는 70대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뜨거운 30대 열정으로 선교 현장에 서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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