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추운날 아침이었다. 한 여인이 비에 젖은 외투를 털면서 커피를 사기 위해 우리 가게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첫 눈에도 평범한 표정이 아닌 것이 마치 홈레스(노숙자) 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알고보니 번잡한 길거리에서 신문을 나누어 주는, 일종의 뉴스 페퍼 우먼이었다.
시간당 얼마를 버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신문을 나누어주는 시간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세찬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시간이었다. 피부는 늘 추위로 부르터 있었고, 단 한번도 깊숙히 눌러 쓴 후드를 벗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어느 햇빛 밝은 날, 날씨가 풀린 탓이었는지 그녀가 순간적으로 파카의 후드를 벗었는데 길고 윤기있는 머리가 치렁하게 흘려내린 그녀의 모습은 이목 구비가 정연한 것이 여간 미인이 아니었다.
순간 밝게 웃는 그녀의 치아 또한 얼마나 희고 아름답게 빛났던지… 어둠 속에 대비된 빛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마치 공주의 신분이라해도 믿겨졌을 그녀의 외모는, 길가의 뉴스 페퍼 우먼의 모습과 교차되어 묘한 비애를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마치 감추어진 비밀이라도 들킨 것 처럼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후론 웬지 우리 가게를 다시 찾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거리에서 신문을 나누어 주던 그녀의 모습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사실적인 삶의 모습을 그린 오페라를 우리는 사실주의 오페라라고 부른다. 뭔가 굉장한 장면은 없지만 가난한 삶과 빈민들의 처절한 역경을 그려내 대중에게 크게 공감을 산, 19세기 말에 시작된 현실파들이 만든 ‘라보엠’, ‘팔리아치’ 등이 그것이다.
매우 오래 전, 오페라 ‘라 지오콘다’를 들으면서 소녀처럼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뭐 남보다 감성이 풍부해서라기 보다는 정말 심금을 울리는 선율 때문이었다. 아니, 하나의 오페라 선율이 저처럼 사실적일 수가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페라에 빠져드는 것이겠지만, ‘라 지오콘다’를 처음을 들었을 때의 그 리얼리틱한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한다.
지오콘다는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으로서, 직업은 거리의 가수인데 베니스에서 막가는 인생을 사는 그렇고 그런 여자였다. 거리의 여자가 무슨 가슴 떨리는 사랑을 했을리는 없고 그저 좋다고 매달린 한 남자와의 연애가 잘 안 풀리자 죽네사네 법석을 떨다가 결국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내용은 좀 시시콜콜하지만 음악이 아름다워 유명하게 되었는데, 작곡가 폰키엘리(1834-1886)는 이 한 작품으로 오페라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불멸의 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게 현실을 그려내는 감동이라고나할까… 폰키엘리는 푸치니, 마스카니와 같은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가들을 키워낸 장본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폰키엘리’를 사실주의 오페라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오페라 ‘라 지오콘다’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EMI 59년 판이 유명한데, 온 몸으로… 아니 온 영혼으로 피토하듯 노래하는 것은 칼라스의 ‘라 지오콘다’가 유일하다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칼라스를 발작적으로 싫어하지만, ‘라지오콘다’ 에서 만큼은 칼라스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오콘다 역은 너무 개성이 강하여, 대가 레나타 테발디 조차도 말년에 가서야 겨우 지오콘다로 데뷰를 치렀을 정도였는데, 칼라스는 약관 20대 초반에 이 리얼리티의 상징적인 오페라를 거뜬히 불러제쳤음은 물론 그때까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었던 불세출의 목소리를 선보이며, 세기적 프리 마돈나의 등장을 예고하기까지 했다.
뚱뚱한데다 거친 목소리의 소유자 칼라스를 길러낸 것은 그녀의 후원자이며 남편 메네기니와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 등이었는데 특히 세라핀은 칼라스의 영원한 음악적 멘토였다. 아무튼 칼라스는 자신을 있게 한 후원자이며 남편 메네기니를 오나시스를 만나는 순간 헌신짝처럼 차버렸는데 오나시스에게 실연을 당하자 후회하면서 옛 남편과 ‘라 지오콘다’를 부르던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괴롭기 때문에 아름답기도 한 것이 인생이라했던가… 시원한 바다… 곤돌라가 떠다니는 낭만의 도시… 베니스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드라마, 지오콘다와 눈먼 어머니가 부르는… 심금 울리는 아리아를 들으며 훌쩍거려보는 것도 일탈의 또다른 정취는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