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유무는 종교의 ‘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등이 경전의 종교들로 꼽힌다.
그 중에서도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경전은 그들이 믿는 신이 자기들에게 내려준 것으로 믿기에 타종교들의 그것에 비해 ‘계시성’이 훨씬 더 강하다.
환언하면, 그들이 말하는 경전이란 인간 측의 사색과 구도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신 쪽에서 전하려는 뜻의 집성인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오류 없는 계시로 믿는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성경 없이는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이유도, 존재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토록 중요한 성경을 항상 끼고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성경이란 꾸준히 듣고, 읽고, 또 묵상해야 하는 대상이다.
신앙은 영적 생명과도 같기에 그 안엔 유기체적 성숙이 있게 마련이다. 기계는 제 아무리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것이어도 자라진 않는다. 에너지만 가해주면 만들어진 그 상태에서 돌아가기만 할 뿐이지 그 스스로가 자라는 건 없다. 반면 생명은 자란다.
신앙 역시 영적 생명체와 같은 것이기에 반드시 자라야 한다. 자라야지 자라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그런데 영적 자람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양분이 되어주는 게 바로 성경이다.
목사는 그런 점에서 성경과 함께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돕는 조력자이다.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해 식객을 먹이듯이, 목사는 성경을 재료 삼아 교인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는 영적 요리사 같은 존재다. 설교는 그가 만들어낸 요리일 것이며, 설교 말씀을 선포하는 예배 시간은 온 교인들이 그 요리로 식사하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도 스스로 요리를 해 먹어야 한다. 소시 적에도 끼니마다 어머니가 해주신 요리만 먹었던 게 아니다. 가끔은 스스로 차려 먹기도 했다. 달걀 후라이도 스스로 부쳐 먹고, 라면도 스스로 끓여 먹곤 했다. 이처럼 교인들도 스스로 말씀의 밥상을 차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일엔 어떤 차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양이 넘치는 지성인이라고 꼭 더 잘하는 건 아니다. 나이 고하, 남녀노소, 또 지위상하를 막론하고 이 일은 철저히 갈망과 열정이 있는 자들의 몫이다.
성경 읽기와 묵상을 등한시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동원된다. 눈이 침침해서(신체적 이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에(습관적 망각). 너무 어려워서(성경 자체에 탓 돌리기). 재미없어서(흥미 본위의 시대적 환경에 푹 젖어 있기에).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세’다.
성경을 향한 태도에 달려 있다. 말씀을 향한 좋은 태도와 자세는 성경을 향한 영적 갈망을 부추기며, 결국 그 갈망이 성경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동인이 된다.
내 주위엔 이런 좋은 갈망을 가진 분들이 몇 있다. 그 중 한 분을 소개한다. 팔십 줄 노인으로서 이 분은 매 주일 예배 후에 내 설교 원고를 달라해 꼭 챙겨 가신다.
귀도 잘 안 들리고 몸도 불편하셔서 예배 때 아무리 집중해도 설교를 잘 못 들으신다. 그래서 가져가신 원고를 일주일에 수십 번 읽으신다. 그분의 고백이다.
“목사님 설교원고가 저의 한 주의 삶을 살려내고 있어요!” 사실 이런 분이 목사 입장에서는 제일 귀한 분이다. 어디 목사 입장만이겠는가? 하나님 입장에서도 이런 분은 아주 귀하다. 말씀을 향한 열망은 명백히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주제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성경을 보면 이런 분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세, 다윗, 다니엘, 에스라, 그리고 바울이 그들이다. 그들의 평생 신념은 다른 게 아니었다.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알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 세상에 나누는 것이 그들의 평생 신념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선언하고 살아가는 중이라면 이 평생 신념 역시 여전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인물 되는 것, 나의 평생 신념으로 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