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강용원의 서양미술 (7) Piere- Augusts Renoir (1841-1919)

2015-08-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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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그레뉘에’ 인상주의 그림 탄생 주목할 만한 사건

강용원의 서양미술  (7) Piere- Augusts Renoir (1841-1919)

La Grenouillere

강용원의 서양미술  (7) Piere- Augusts Renoir (1841-1919)

르노아르 자화상

르노아르는 1841년 2월25일 중산층 테일러인 아버지와 씸스트레쓰 엄마사이에 쎈트럴 프랑스에 위치한 도자기로 유명한 리모지 고장 에서 태어난다. 그의 부모는 그가 5살 되던 해에 파리로 이주하게 되며 13살되던해 르노아르는 크리스쳔 브라더스 스쿨에 들어간다. 그후 유명 도자기 공장, 리비브라더스에서 페인팅을 배우며 접시와 Teapot 등에 그림을 그리는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 저녁에는 아트스쿨에 다니며 19세기중반 르노아르는 그의 성장기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내게된다.

1858년 리비브라더스가 문을 닫았을때 17살된, 틴에이저, 르노아르는 윈도우 블라인드, 카페의 미로어, Fan, 램프 등에 와토, 프레거나드, 부커 등 18세기, 로코코 페인터들의 그림들을 카피하여 페인트하는 일을 해가며 고학을 하게된다.

르노아르는 이와같이 올드 매스터들의 그림들을 카피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하며 이들의 그림들을 공부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 로코코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은 후에 르노아르가 페인터로서 성공을한 후에도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가 21살되는 1862년에는 에콜-데-보스아츠, 미술학교에 들어가게된다. 4월에는 Academy of Swiss Painter, 찰스 글레어에게 정식으로 Fine Art를 공부하기 시작하게되며 그곳에서 알프레드 씨씰리, 프레데릭 바질, 클로드 모네 등을 만나게된다.


그러나 그들이 아카미에서 배우는 그당시 컨템포러리 스타일의 그림들은 당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아닌 역사나 신화를 소재로하는 Academic Tradition에 의한 싸이즈가 크고 어두운 톤의 그림들이었으며 때문에 쌀론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조건들을 갖추었어야만 되었다.

그러나 르노아르의 초창기 작품들은 빛, Light를 처리하는데 있어 당시 그가 그림을 배우던 찰스 글레어 선생의 아카데믹한 스타일보다는 오히려 동료 아티스트인, 클로드 모네의 영향을, 그리고 색깔, Color Treatment 는 당대 로맨틱 아티스트인, 유진 델라크로아 등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20대중반, 르노아르에게 아티스트, 주을스 레커는 그의 Personal Life에 중요한 역할 을 하게된다. 주을스 레커는 그의 미스트레쓰, 클레망스 트리오가 사는 말롯 (Marlotte) 에 르노아르를 살게하고 곧 그녀의 17살된 여동생, 리스 (Lise)는 르노아르의 Mistress 가 된다. 리스는 그의 Favorite Model 이되며 그녀는 “Women of 알지에 (Algier)”에 모델한 것을 끝으로 1872년 Architect와 결혼해 떠나게 되고 그후 르노아르와 연락이 끊기게 된다.
1867년 26살에 르노아르는 쌀론 주어러 들의 취향에 맞추어 신화를 소재로한,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 로 묘사한 리스를 모델로한 “Goddess of the Hunt” 로 파리 쌀론에 출전하지만 입상하지 못한다.

낙심하지않고 그이듬해 1868년 27살에는 대담한Brush Stroke 와 강열하고 밝은 이미지로 Execute한 “Lise with Parasole”(1873 Sold ) 로 다시 출전하여 입상하며, 2년후 1870년, 29살에 Women of 알지에(Algier) 로 쌀론에 입상하게 된다
1860년 후반 아티스트들과 지식인들이 아티스틱 이슈를 토론하기 위해 카페 게부아 (Caf? Gebua)에 모여 밤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면서 Art Theory에 대해 토론들을 하였으나 르노아르는 아티스트들이 할 일은 아트를 창조 하는데 있지 말로만 이론을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이들 동료 아티스트들의 카페 게부아의 모임에는 가지 않았다.

1869년여름 당시 28살, 르노아르는 루빈씨엔, 그의 부모집에 머물며 클로드 모네는 가까운 쌍미쉘에 거주하게 되며 이 기간 동안 모네는 하도 가난해서 르노아르가 그의 엄마 몰래 빵을 훔쳐다 모네에게 준 일화도 있다. 또한 그들은 쎄느강변의 인기있는 해수욕장인, “라그레뉘에” 에 나란히앉아 함께 미술활동을 하였다.

당시 그림들은 페인트를 붓으로 섞지않은, “Unmixed Color” 를 사용 하였으며 보다 대담하고 투박하고 거칠은, Detail이 결여된, 단지 경치의 Impression 만이 Floating 하는 작품들을 그린 “라그레뉘에” 1869년 해수욕장의 여름은 Impressionism 그림 탄생의 Remarkable 한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듬해 1870 년 7월, 프랑코 프러시안 전쟁이 일어나자 모네는 런던으로 피신 하고 프레데릭 바질(Frederic Bazile)은 군에나가 전사하고, 르노아르는 기마병에 입대한 다음 프랑스 남부에 배치되며 병에 걸려 병원으로 옮겨 생명을 구하게된다.

르노아르는 일 년후 1871년 전쟁이 끝난후 파리로 돌아오며 1871년3월18일에서 5월 28일 두달 동안에 르노아르가 쎄느강변에서 Painting을 하고 있을때 어떤 컴뮤나드가 그를 스파이로 오인 해 컴뮨(Communard) 리더인 라울 리골트가 바로 그가 전에 도와주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르노아르를 쎄느강에 밀어 넣을 뻔했다.

애나키스트와 막씨스트가 갈라지기 전까지 존재한 패리스 컴뮨은 프랑스가 프랑코 프러시안 전쟁으로 패배한 후 파리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이며 소요는 주로 전쟁의 참패에 따른 프랑스 중산층에서 늘어나는 불만때문에 생긴 것이다.

1871년 전쟁이 끝난후 Settlement 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레인 일부 지역을 프러시아에 내주어 독일의 일부가 됨으로써 나폴레옹 3세와 Second French Empire의 몰락과 함께 프랑 스는 제3 공화국을 맞게 된다. 그후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알자스와 일부 로레인 지역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다시 프랑스에 돌려주게 된다.

1871년 패리스 컴뮨사건이 있은 후 1874년 당시 르노 아르 33살때 앞서 언급한 주을 스레커 와 그의 가족들과의 10년동안의 우정도 끝나게 되며 르노아르는 그간 Association에서 받던 도움은 물론 그간 폰텐 블루근교 Property에 머물며 숲속경치를 그리던 모든 혜택을 박탈 당하게되며 그결과로 Favorite Painting Location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그의 그림에 Subject 도 뚜렸하게 바뀌게 된다.


1881년 당시 40살, 르노아르는 알제리아 여행후 유진 델라크로아의 인연으로 알게된 디에고 발레 스케즈의 작품을 보기위해 마드리드로 가며 그후, 후기 르네상스화가, 티션의 매스터피스와 라파엘의 대작들을 보기위해 이태리로 여행을 떠난다.

1881년1월 15일 에는 팔레머, 씨씰리에 사는 작곡가 리하드 바그너의 집을 찾아가 만나며 르노아르는 바그너의 초상화를 단 35분 만에 그린다. 같은 해에 르노아르는 폐렴에 걸려 6주 동안 알제리에서 회복을위해 휴양을 하나 그당시 폐렴으로 그의 호흡기 질환은 영구적인 손상을 받는다.

1883년, 42살에는 건지에서 여름을 보내며 한달 좀 넘는 동안에 15점 이상의 그림을 그린다.건지는 해변, 절벽, Bay, 숲, 산 등의 다양한 풍경 을 갖춘 English Channel의 채널 아이어런드의 하나이다. 르노아르가 몽마르뜨 에 사는 동안에는 쑤제인 밸라돈을 모델로 썼으며 그녀도 당시 Leading Painter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1887년 퀸 빅토리아 골든 주블리에는 여왕의 친지인 필립 리치버그의 부탁으로 French Impressionist Painting 에 그의 그림들도 여러점 기증하였다. 1890년 49세에, 르노아르는 동료 아티스트들이 축하하는 가운데 아이린 빅토린 샤리고트와 결혼한다. 그녀는 1881년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에 모델이었으며 르노아르는 그녀와의 사이에 이미 1885년 44살때 아들 삐에르를 낳았다.

결혼을 한 후 르노아르는 아내,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Nurse이며 아이린의 사촌인 가브리엘 레너드 등의 일상생활, Family Life 등을 그리었다. 르노아르는 아들이 셋 있었으며 Jean은 영화 제작자이었고 삐에르는 영화배우가 되었다.

1892년 51세에 르노아르는 류머토이드 관절염이 진전되기 시작하여 1907년 67세에는 기후가 따뜻한 지중해 “르콜렛” 으로 이사를한다. 르노아르는 휠체어를 탈 정도로 그의 관절염이 그가 움직이는데 심각하게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여생 20년 동안 페인트를 계속하였다.
그의 손은 변형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오른쪽 어깨 앵키로이씨스는 그의 페인트 테트닉에 Adopt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Arthritis 가 심각할때는 그의 마비 된 손에 브러시를 붙들어 매고 페인트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이며 브러시를 손에 갖다 놓는 데는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자신이 브러시를 Hold 할 수는 있었으며 손에 붕대를 감았던 사진은 피부염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노아르는 Old Master들의 그림들과 함께 걸린 그의 그림들을 보기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며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독일 남쪽 알자스와 로레인지역을 불란서로 돌려준 같은해 1919년 12월 3일 78세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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