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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생명존중과 자살

2015-07-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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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철학교수)

여름 방학이 되어 오래 보지 못했던 동료 교수를 만나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일이 있어서 만나기가 어렵다는 전화를 받고 섭섭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촌이 자살을 해서 생각이 몹시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는 할 말이 없었다. 자살이라니…… 아니 젊은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단 말인가?

자살을 미화하던 일본의 문화와는 달리, 우리 한민족은 자살을 인간 윤리의 바탕을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여겨왔다. “산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나, “백 년을 살아야 3만6,000날”이라는 속담들은 인생은 짧은 것이요, 어렵게 살아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명존중 사상을 분명히 드러내는 증거였다.


이런 사상은 유불선 (儒佛仙) 가르침의 초석 이었고 기독교도“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하나님 외에는 거둘 수 없다”는 생명존중 사상을 무한대로 넓히는데 공헌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이혼율과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소식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자살을 하고,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이 불투명한 명단을 남겨놓고 자살을 하는가 하면, 무수한 어린 생명을 수장한 장본인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이유가 무엇이던 자살이 결코 옳은 선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회 지도층들의 선택은 광범한 사회적 파장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청소년들이 공부가 힘들다고 자살하고 따돌림을 당한다고 자살을 하는가 하면, 사업에 실패한 기업인이 혹은 생활이 어렵다거나 고시에 낙방했다고 자살하는 것이 이제는 한국사회의 풍조가 된 느낌이다. 가치관의 혼란이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말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자살을 선택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불교를 믿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생명을 동일하게 존중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귀한 자신의 생명을 자살로 마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살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일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하나님 외에는 거둘 자가 없다’고 믿는 기독교인이 자살을 선택했다면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 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겠다는 결단인데, 그런 결단 없이 무엇을 믿었다는 말인가?

한국 기독교와 불교의 신도를 합하면 인구의 70%가 된다고 한다. 모두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는데 자살률이 왜 이렇게 높은 것 일까? 믿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파행은 한국인의 특징인 듯하다.

심하게 말하면 인구의 대부분이 자아분열증에 시달린다는 말과 같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믿음의 근본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옳은 가르침을 받고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유약함 때문일까?


성공 제일주의를 가르치는 한국 교육, 거창 하고 화려한 불교사찰의 파렴치함, 깊은 영성 보다는 양적 팽창을 제일로 삼는 기독교의 무분별함이나, 사회를 정화하고 이끌어가야 할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을 위해 사회 분위기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곳에서 그런 자아분열 증상은 더욱 잘 드러난다.

이런 진흙탕 속에서는 생명이 귀한 것 이라는 삶의 근본을 살피는 지혜 보다 자살이라는 도피가 더 쉬운 선택일 수도 있다. 어느 한 곳에 이런 현상의 원인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삶의 목적과 윤리의 근본을 가르치고 실천하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집착하고 자녀들을 몰아가는 것이 이런 생명경시 현상의 큰 원인이 아닌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明善以復初)이 우리 삶 속의 선(善)을 밝히는 길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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