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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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의 서양미술 산책 (1) 피터 폴 루벤스

2015-07-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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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색채 돋보이는 바로크 미술의 대가

17세기 반종교개혁 문화예술 전반에 영향
초창기 르네상스 왕실 화가 임명 활약
말년에 도시 외곽서 지내며 풍경화 몰두

17세기에 있어서 북유럽은, 1609년 휴전협정으로 오랜 기간 전쟁으로 고통 받던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북쪽은 프로테스탄트인, 유나이티드 프로방스 (지금 현재의 네덜란드- 홀란드) 그리고 남쪽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통치하는 가톨릭 국가인 현재의 플란더스(Flanders)를 포함한 벨지엄 지역 등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 후 1648년 묀스터 조약으로 공식 인정됨). 현재 한국과 북한도 휴전 협정후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 (닮은꼴)을 시작으로.)

따라서 가톨릭 영향권에든 남쪽 Flanders 와 스페인은 반종교개혁 ( Counter Reformation) 이란 종교적인 아이디얼리즘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게 되고 예술에 있어서도 서로 비슷한 공통점을 공유하게 된다.

스페인 점령으로 Flanders 의 산업 또한 살아나게 되고 따라서 앤트워프에 있는 미술사회도 발전하게 되는 문화적인 혜택도 보게 된다. (한국 또한 공산주의 아닌 민주주의를 택함으로써 미국의 영향권에 든 한국은 문화적인 혜택은 물론 산업 또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도 잘 살게 된 것 또한 닮은꼴)
피터 폴 루벤스

칼핀니스트(Calvinist)인 그의 아버지와 엄마는 스패니시 네덜란드 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의 박해와 종교적 혼란의 가중으로 1568년 앤트워프에서 Cologne 으로 피신 한다. 그의 아버지 얀 루벤스는 1570년 Siegen 왕실에 들어가게 되며 오렌지, 윌리엄I세의 둘째 부인인 쌕쏘니, 아나의 Adviser가 된다. 그 후 그녀와의 Love Affair로 감옥에 투옥 된 사건이 있은 후 1577년 루벤스가 씨겐(Siegen)에서 태어난다. 그 이듬해 그의 가족들은 콜론으로 돌아온다.


1589 년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2년 후에 루벤스는 그의 엄마와 앤트워프로 이주해 가톨릭가정에서 자라면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앤트워프에서 루벤스는 고전문학, 라틴어 그리고 휴머니스트 교육 등을 받게 된다. 그리고 루벤스는 14살 되던 해에 Tobias Verhaeght 에게 미술에 대한 훈련도 받게 된다. 그 후 당시 두 명의 앤트워프 정상급 매너리스트 페인터인 애담 밴누트와 오토반빈에게도 사사를 받게 된다.

루벤스가 24살 되던 1600년에는 그동안 카피 한 그림으로만 보아 왔던 위대한 르네상스와 고전 걸작들을 직접보고 배우기 위해 이태리 여행을 떠나 곤자가 , 듀크빈 첸조 1세 왕실이 있는 만투아에 정착하게 된다. 첫 번째로 베니스에 도착하여 티션, 베로 네쓰 ,틴토레토 등 비니시언 후기 르네상스 대가들의 걸작들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 후 루벤스는 베론네쓰와 틴토레토 등에게 색감과 콤포지션을 그리고 티션으로부터는 그의 성숙한 스타일등 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벤스는 한때 로마에서는 그 당시 현대적인 콘템포레리인 이탈리안 바로크 페인터의 대가인 카라바지오의 영향도 받게 된다. 또한 루벤스의 그림 Descent from the Cross 에서 드라마틱한 키아로쓰 큐로(Chiaroscuro -그림에 있어 빛과 그늘-명암Distribution 특히 카라바지오-렘브란트 등 바로크 스타일 그림들에서 많이 사용됨) 의 사용 그리고 휴머니스틱한 리얼리즘 등 카라 바지오의 영향과 또한 그의 그림 Dead Christ 등에서 울퉁불퉁한 근육 등 미켈란젤로의 영향도 볼 수 있다.

루벤스는 그간 8년간의 긴 스페인 여행 도중 자기보다 22세 연장자인 스패니쉬 바로크 페인트의 거장인 벨라즈 퀘즈 (Velazquez)도 만나게 된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1609년 (휴전협정이 된 같은 해) 33세 되던 해에 그는 네덜란드 가버너 아치듀 크 앨버트와 그의 부인 인펀타(Infanta)이사벨라의 왕실 페인터로 임명된다.

지난 12년간 앞서 언급한 휴전 협정동안에는 아치듀크 앨버트와 인펀타 이사벨라가 평화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가톨릭 통치를 계속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1621년 휴전협정이 끝나고 아이러니컬하게 그간 남쪽을 통치해 오던 가버너, 아치듀크 앨버트가 죽는다.

그의 부인 이사벨라가 가버너직 Regent 역할을 수행 하게 되나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누구와 우방이 되고 누구와 적이 되느냐를 결정해야 되는 상황에서 위치는 불확실 하게 된다. (지금 한국이 강대국 사이 처한 위치 또한 닮은꼴 )

그녀(이사벨라)의 신임이 두터운 루벤스는 Spanish Netherlands 의 대표인 이사벨라를 위하여 프랑스와 영국과 협상 하기위해 불려간다. 1622년에는 일하기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랑스왕, 헨리IV세의 미망인이며 루이 13세의 엄마이기도 한 마리아 디 메디치를 위한 큰 프로젝트를 파리에서 수행하도록 하사 받는다.

두 개의 전체 갤러리는 여왕과 그녀의 죽은 남편 헨리IV세의 생애 등 2편으로 장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리아는 변덕이 심하고 일하기가 까다로운데다 그녀와 친한 카디 널 뤼실류는 루벤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느끼게 됨으로 수년간 불편한 관계로 결국 마리아가 왕실을 떠날 때 프로젝트는 반 정도 중간에 포기하게 된다.
1625년, 전염병이 앤트워프에 퍼지게 되므로 루벤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전염병의 고비가 지날 때까지 브랏쎌로 이사를 한다. 그들은 앤트워프로 돌아오게 되나 결국 그의 부인 이사벨라는 전염병으로 의심되는 병으로 죽는다. (근래에 한국에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으로 난리를 치고 있는 것도 닮은꼴)


루벤스는 슬픔을 잊기 위하여 그리고 강대국들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한 외교 생활에 전념하게 되고 영국왕 찰스 1세로부터 여러 개의 커미션을 하사 받아 Whitehall Banqueting House 천장에 그린 전쟁과 평화와 기타 프로젝트 등을 위하여 여러 달 영국에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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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는 1624년에 인펀타 이사벨라의 조카 King, Philip IV세로부터 Patent of Nobility기사 작위가 수여되며 1627년에는 Gentleman of the Household 등 더 큰 기사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위치에 앉게 된다. 스페인왕 Philip IV세는 루벤스에게 1630년대에 8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도록 커미션을 내린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다.

루벤스는1629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도 Master of Art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1630년에는 영국 왕 찰스 1세로부터도 기사 작위도를 받는다. 루벤스는 1630년 53세에 나이 어린 16살 난 귀족 아닌 평민의 딸 헬레나 퍼먼트 (Helene Fourment) 와 결혼함으로써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녀와 다섯 아이들을 갖게 되며 그녀는 The Judgment of Paris 에 비너스의 모델로 나오는 것 외에도 수많은 그의 그림 모델이 된다. -

루벤스는 1635년 앤트워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에 매너 하우스 별장을 사들여 말년에 별장 샤토 드 스틴(Chateau de Steen)에서 젊은 부인과 어린자녀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며 그림 또한 팔기보다는 취미를 위하여 많은 풍경화를 그리게 된다. 그는 여러 해 동안 Gout(관절염 일종의 뼈 질환)로 고생하다 1639년 병세가 악화돼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고 수개월 후 1640년 5월 63세에 세상을 떠난다.

■강용원 씨는 한국의 서울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중에 미국 캔자스 교향악단의 초청으로 1965년도에 미국에 와서 이듬해 맨하탄 음대에 입학했다. 강씨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중 서구문명 역사를 수학하면서 세계 미술사와 서구문명 역사에 심취했다.현재 뉴저지 포트리에서 아라베스크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강씨는 매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올쎄이 뮤지엄과 오렌저리 뮤지엄, 루브르 박물관 등을 오기면서 미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지식을 습득했다. 이를 매주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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