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민족간 전쟁 다시는 없어야지요"

2015-06-24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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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 기획 오늘은 6*25 65주년

▶ 한국전때 인민군에 징집돼 참전한 오다위 신부

"한 민족간 전쟁 다시는 없어야지요"

오다위 신부의 저서 ‘낙동강의 발자국’ 표지

"한 민족간 전쟁 다시는 없어야지요"

한국전쟁을 회고 는 오 다위신부

낙동강 전투서 죽을 고비 넘겨***포로 석방때 남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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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철부지 나이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강제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오다위 신부(81.성공회 David Oh)는 “동족간 서로 죽이는 비참한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공회 사제로서 사목을 하다가 은퇴후 현재 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는 오다위 신부는 황해도 안악고등학교 2학때이던 1950년 7월에 인민군에 강제 동원되어 전쟁터로 나가게 됐다.


오 신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9년부터 인민군대들이 신천과 안악 등 38선 접경에 집결하기 시작하더니 1950년초부터는 갑자기 모든 고등학교에 교관 2명이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전했다. 북한 방송에서는 남조선이 먼저 침략하였으므로 인민의 군대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남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선전했으며 안악고등학교에도 동원 명령이 내려졌다. 인민군 트럭에 올라탄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갔다. 유엔군의 폭격을 피하느라 밤에도 헤드 라이트를 켜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학생복을 입고 나왔다가 인민군복을 지급받았으며 계급은 무등병이었다.

1950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그의 인민군 부대는 총공세에 나섰으나 화력면에서 절대우세한 유엔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오 신부도 치열한 전투중 오른쪽 다리에 유엔군 탱크의 폭격 파편을 맞아 상처를 입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겼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남한 동포를 한번도 미워한 적도 없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북은 남한 괴뢰라며 죽이라고 강요를 받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고한다. 1950년 9월 인민군은 완전 패잔병이 되어 후퇴에 나서게 됐다. 후퇴중 인민군 부대 탈출을 결심한 그는 1950년 11월 유엔군에 귀순하여 포로 생활을 하게 됐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4년간 포로 생활을 하던 그는 1954년 1월 포로 교환때 남한을 택하여 자유를 찾게 됐다.

오 신부는 북에 가지 않고 남한을 택한 것에 대해 가족이 반동 분자로 몰려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는 등 공산당이 싫어서였다고 답변했다.

포로 생활중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그는 석방되어 나오면서 선교사나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1967년 성공회 성 미가엘 신학대학원을 졸업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한국에서 사목을 하다가 1972년 미국으로 왔다. 버지니아 성공회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그는 1975년부터 성공회 사제로 사목을 하다가 2005년에 은퇴, 현재는 아내 오안나씨와 함께 새크라멘토 인근 카마이클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다위 신부는 한국전쟁의 시발부터 전쟁 상황과 포로 생활을 기록한 자전 소설 ‘낙동강의 발자국’을 지난 2010년 출간했다. 오 신부는 책의 출간 동기를 “분단된 조국과 동족 상쟁의 비극의 한가운데로 걸어온 자신의 슬픈 과거를 후손들에게 남겨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의 오다위 신부는 “현재의 남북한 상황을 보면 영구분단의 우려도 있으나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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