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석<음악박사>
진보와 보수는 죽어라고 싸운다. 왜 싸울까? 뭐 이유가 있나 그냥 서로의 생각과 이상이 다르니 싸우고 있는 것이지. 한국의 정치 얘기냐고? 아니다. 19세기 후반부의 음악사 이야기로, 그 당시 음악적 견해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이다. 아마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음악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나하고 의아해 하실 것이다.
그렇다. 음악적 진보와 보수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진보는 새롭게 개혁하자는 것이고 보수는 전통을 지키자는 것 아니겠는가? 음악도 역시 그렇다. 여기에 음악적 진보와 보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표제음악과 절대음악을 이해하여야한다.
표제음악은 음악으로 음악이외의 것을 표현하는 음악이고 절대음악은 음악으로 음악이외의 것이 아닌 음과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음악이다. 그래서 대부분 표제음악은 제목이 있고, 절대음악은 제목이 없다. 진보는 새로운 음악을 주장하며 표제음악을 지향하였고 보수는 전통을 지키자고 하며 절대음악을 지향하였다.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음악적 이상과 꿈은 전통적 관념과 틀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었다. 그를 뒤따르는 낭만시대의 작곡자들은 베토벤의 이상을 실현하여 음악에 사상과 관념 정신 그리고 이야기를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표제음악’이다. 베를리오즈는 환상 교향곡에 소설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단악장 교향곡에 시, 소설, 회화 등을 표현하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고전적인 형식과 규칙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낭만시대의 거의 모든 작곡자들은 이런 표제음악에 심취했다. 사실 표제음악으로 하여 음악이 표현 할 수 있는 영역과 내용은 말도 못하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미래로 가고 싶어 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어 하던 그들은 진보적인 작곡자들이었다.
이런 진보적 작곡자들의 정점에 섰던 작곡자가 바로 바그너이다. 그는 교향곡, 소나타, 그리고 실내악 같은 전통적인 음악은 이미 베토벤으로 끝났다고 주장하고, 새로운 음악형식을 추구했다. 그것이 미술, 문학. 철학, 음악이 합쳐지는 총체적인 예술, 음악극이었다.
음악극은 오페라와 매우 비슷하나, 음악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스토리가 강조되는 종합예술이다. 그 당시 모든 작곡자는 이 바그너리즘에 심취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음악의 나갈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진보적인 사상과 형식의 파괴는 자연히 반대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멘델스존, 슈만, 한슬릭 같은 작곡자들은 전통적인 형식 안에서 음악적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운 작곡자가 브람스이다. 그는 고전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전통적인 작곡 형식에 따라 작곡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결코 표제음악을 쓰지 않고 절대음악만을 고집하였다.
유럽의 음악계는 이런 두 가지의 주장으로 첨예하게 갈라져 싸웠다. 진보적인 바그너를 지지하는 표제음악파, 그리고 브람스를 지지하는 절대음악파이다. 심지어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이 싸움에 동조하여 브람스를 반대를 위한 반대자라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바그너와 브람스가 서로 베토벤의 후예임을 주장한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음악적 재료(무한선율, 라이트모티브)들이 다 베토벤이 처음 시도한 것이라고 하였고, 브람스는 모든 음악은 베토벤이 만든 형식과 틀 안에서 작곡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베토벤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럼 누가 베토벤의 진정한 후예인가? 말해 무엇 하나 두 사람 다이지.
그래서 싸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무지 심하게 욕하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뭐 결과는 없다. 생각해 보면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 아니면 손바닥과 손등 같은 존재 아닌가. 늘 같이 존재하며 같이 살아야하는 사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