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 칼럼] 다람쥐, 너 였어?
2025-08-19 (화) 12:00:00
김영화 수필가
우리 집 담장 넘어 뒷집에 10 피트 정도 되는 키 큰 구아바(guava) 나무가 있다. 올해도 두 살되는 우리 손주 주먹 만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구아바가 노랗게 익어가는데도 집주인은 아예 따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대신 동네 새와 다림쥐가 신이 나서 즐기고 있다. 나 역시 거의 매일 아침 습관처럼 뒷뜰에 나가 잔디밭에 떨어진 구아바 두 세 알씩 주워다 새콤달콤한 맛을 즐기곤 한다. 담장에서 좀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에서 구아바가 우리 뒷뜰에 떨어져 있는 것이 가끔씩은 신기하고 궁금했다. 하지만 밤마다 바닷바람이 우리 집 쪽으로 불어오니 바람따라 떨어졌으리라 생각하며 내심 바람에게 고마워 했다.
오늘 따라 이른 새벽부터 까마귀와 참새들이 큰소리 경연대회를 하는 통에 일찍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일로 누구를 깨우고 싶어서 이 난리냐며 호통을 칠 양으로 창문을 힘있게 열었다. 그때, 새끼 고양이 만한 영특하게 생긴 낯익은 다람쥐 한 마리가 높은 구아바 나뭇가지로 능숙하게 올라가, 열매를 따서 우리 마당에 툭툭 두 개를 떨어뜨리고 한 개만 입에 물고 담장을 따라 총총 달아나고 있다. “어! 너였어?”
생각해보니 매번 구아바 껍질에 살짝 긁인 자국들이 있었다. “내가 구아바 좋아하는 것을 알고 늦여름부터 봄까지 거의 매일같이 두 세 개씩 떨어쳐준 주인공이 바닷 바람이 아니고 너 였구나!” 지난 번 우리 무화과를 따 먹다 내게 들켜서 혼이 나 도망쳤던 그 다람쥐 같아서 더 염치없고 미안한 마음에 창문을 살짝 닫았다. 우리집 뜰에 있는 과일들이 다 내 수고로 만 자라서 익어가는 줄 착각했다.
햇볕, 바람과 비를 내려서 키워준 창조주의 손길을 잊고 내 땅에, 내가 가꾼 내 것이라며 인색하게 굴었다. 그런데 이 친절한 다람쥐가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오늘 아침에 새들은 나를 깨워서 그의 나눔, 배려심있는 선행을 보여 주려고 그리도 “까악까악,찍짹,일어나!” 라고 내 닫힌 창문과 마음의 귀에 안타깝다는 듯 알림 노래를 했다. 다람쥐와 새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처럼 뒷뜰의 과일들을 맛있는것 만 골라 먹어치우는 이기적인 백해무익한 동물이 아니었다. 그들을 향한 내 편견을 버리고 그들과 나누어 먹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한번 맛을 본 과일은 조금씩 먹고 버리지 말고 가능한 다 먹어서 낭비하지 말자고 부탁하면 들어줄려나?
다람쥐나 새를 오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것 처럼,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냥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며 살아왔던가 생각해본다. 똑 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 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이다. 모든것을 자기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분쟁이 생긴다. 나와 다른 사람의 삶에도 서로 공감해 주며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텐데.
새들의 노래소리가 즐겁고 다람쥐의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안개를 걷어낸 아침 햇살이 더욱 빛이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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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