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취산 이어 비슬산·고려산 등에서 축제 열려
강화 고려산 진달래꽃.
여수 영취산 진달래꽃.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언제 불러도 뭉클한 동요, 언제 들어도 아련한 우리 민족의 노래다. 길가는 남녀노소, 갑남을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모르는 이가 없다. 특히 진달래꽃은 떠나온 고향과 어린시절을 눈물로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대명사다.
동요 ‘고향의 봄’ 뿐이던가. 진달래꽃은 노래와 시에서 민족적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화였다. 척박한 땅에서도 따스한 정감의 꽃잎을 화려하고 강인하게 펼쳐내서일까. 특히 일제 때는 망국의 설움과 슬픔, 그리고 저항의식을 상징했다.
“바위 고개 핀 꽃 진달래꽃은 /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 /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나라 잃은 민족의 심사는 처절하게 마련이다. 남의 머슴살이하며 온갖 설움을 당하면서도 이를 겉으로 나타내지도 못하는 통한의 신세. 그 고초와 아픔을 진달래꽃에 비유하고 의지해 이겨내고자 했다. 작곡가 이흥렬이 애환의 노래 ‘바위고개’를 내놓은 때는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1933년이었다.
시인 박팔양은 진달래꽃을 봄의 선구자라며 예찬한다. 하지만 그 모습에선 시의 제목 ‘너무도 슬픈 사실’처럼 불운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해방 후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진달래가 거론됐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겠다 싶다. 그만큼 친숙하고 화려하고 애잔해서다.
“진달래 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 봄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앞서 얘기한 바처럼 진달래꽃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진분홍의 꽃무리는 금방이라도 산언덕을 태울 듯 붉게 물들인다. 진달래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산에 불이 붙은 것 같다’(萬山紅如火)고 한 것은 ‘언즉시야’다 싶어 무릎이 절로 쳐진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대한 찬양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진달래를 소재로 한 가장 오래된 시가로 꼽히는 ‘동동’(動動). 이 고려가사에서도 ‘삼월 나면서 활짝 핀 / 아! 늦봄의 진달래꽃이여 / 남이 부러워할 자태를 / 지니고 나셨도다 / 아으 동동다리’라며 예찬한다.
진달래 하면 얼른 떠오르는 대표적 명소가 평북 영변이 아니던가. 관서팔경의 하나라는 이곳 약산의 동대(東臺)에서 바라보는 진달래꽃밭은 가히 절경이었다. 김소월이 시 ‘진달래꽃’에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고 노래한 게 그렇고, 저 먼 남녘의 섬 진도에서마저 ‘약산동대 진달래꽃은/ 한 송이만 피어도 / 모두 따라 핀다’며 ‘진도아리랑’ 가락에 언급된 것 또한 그렇다.
꽃의 계절인 봄을 맞아 온갖 생물이 앞 다퉈 약동한다. 특히 4월 들어서더니 전국 곳곳에서 겨레의 꽃인 진달래가 곱게 곱게 꽃잎을 터뜨리고 있다. 민족은 비록 남과 북으로양단됐으나 진달래꽃은 남북을 구분하지 않고 한라에서 백두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그렇다고 볼 때 민족의 애환은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깊은 정한을 간직한 민족의 꽃이 피는 이때에 진달래 축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일부 지역에서는 ‘참꽃’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열기도한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수 없는 철쭉꽃을 ‘개꽃’이라 부르며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 즉 참꽃과 구별했다고 한다.
진달래 축제는 국내 최대 진달래 군락지로 꼽히는 여수 영취산에서 꽃의 축포를 터뜨렸다.
여수 영취산 진달래 축제는 2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진달래 축제는 개화시기를 따라 빠르게 북상한다. 인천 강화에서 18일부터 30일까지 고려산 진달래 축제가 진분홍의 진수를 선보인다. 경북달성에서도 18일부터 26일까지 제18회 비슬산 참꽃문화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겁다! 진달래 만발하는 계절을 맞아그 속내를 알고 꽃잎에 눈길을 준다면 더욱 가슴 뭉클하지 않을까 싶다.
축제란 말 그대로 일탈과 어울림 아니던가. 자연과 인간,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어 생명을 찬양하는 감격의 마당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