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우남수 목가 ㅣ 어떤 ‘메멘토 모리’를 택할 것인가

2015-04-15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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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주평 선생님의 갑작스런 소천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하긴 이따금 뵐 때마다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던 허약한 체구였고 계속 읽었던 수필을 통해 수술 받은 이야기 등을 전해 들었지만 끈질기게 창작 활동과 모임 참석 등을 해오신 터라, 내 속마음으로는 “약골의 장수”가 100세 시대의 모델 케이스로 방지일 목사님처럼 100세 넘게 장수하시길 바랐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생을 한걸음으로 아동극의 길을 걸어 오고, 항상 최선을 다하였던 그를 그 정상에서 부르셨다. 모세는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으니, 그 기준으로는 팔순을 넘기셨고, 고생 않으시고 갑작스레 돌아 가셨으니, 동양식으로 오복 중 마지막 복인 고종명(考終命)까지 채우신 복되신 분이었다.

그런 복된 죽음을 맞으신 분으로 나는 내가 20년 넘게 봉직했던 San Jose Christian College 창립자 William Jessup 목사님을 기억한다. 그 분은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로, 설교나 주님의 일을 하다 부름 받는 것을 넣어 두었고,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어느 주일 설교를 끝낸 후 심장마비로 소천하셨다.


유언대로 시신은 스탠포드 대학교 병원에 기증하고, 천국환송예배는 그의 동영상과 설교를 들으며 자손들의 추모와 지인들의 간증들로 완전히 잔치 같았던 장례식에 내가 참석한 기억이 있다. 얼마나 멋진 육신의 삶의 마감인가! 그리고 영혼은 이어서 천국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는 기쁨과 잔치의 연속이 아닌가!그 외로도 내가 좋아하는 죽음 가운데 하나는 꼭 신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스캇 니어링 박사의 죽음 이야기다.

경제학자로 20세기 초반 사회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나이 50쯤 되던 1932년 도시의 물질 문명에 등을 돌리고 버몬트의 시골로 들어 갔다. 그 곳에서 니어링 부부는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40여 권의 책을 저술하며 ‘단순한 삶’ 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왕성하게 일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던 니어링은 99세가 되자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살만큼 살고 일할 만큼 일했다는 판단이었다. 100세 생일을 한달 여 앞둔 때부터 그는 곡기를 끊고 과일 주스만 마시다가 100세가 되고 2주쯤 지난 어느 날 그의 숨이 점점 느려지더니 한 순간 고요해지고 그는 아주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그 부인 헬렌은 전했었다.

잎의 수명이 다하면 스스로 땅으로 떨어지듯, 죽을 때가 되면 동물들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먹기를 중단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듯, 그는 다른 모든 생명체가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을 환영했다. 죽음을 거부하는 농담 가운데 “저승 사자가 찾으면”이 있다.

회갑(60): 지금 안 계신다고 여쭈어라, 고희(70): 아직 이르다고 여쭈어라, 희수(77): 지금부터 노락(老樂)을 즐긴다고 여쭈어라, 산수(80): 이래도 아직은 쓸모 있다고 여쭈어라, 미수(88): 쌀밥을 더 먹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졸수(90): 서둘지 않아도 된다고 여쭈어라, 백수(99): 때를 보아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미국 같이 사회 보장 제도와 의료 혜택이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선 환자의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의료진은 온갖 연명 치료로 생명을 연장시키느라 막대한 치료비를 소비하고, 환자의 삶의 질 보다는 생명 연장에만 집중한다

“저승 사자가 찾으면”의 누구처럼 생명의 연장만을 계속하는 것이 정말 상책일까, 아니면 위에 들었던 예들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더 타당한 일인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어느 수도원의 표어는, 이제 어떤 죽음을 기억하며 살 지는 그 역시 우리가 선택하고, 하나님께 그렇게 되도록 매달려야 되는 때가 되었다.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테로 나오게 하시는”(욥 12:22), 그 분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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