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산 조오현 큰 스님과 UC버클리 권영민 교수와 대담(2)

2015-04-0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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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는 시의 근원이며 한국인 영혼의 모음”

시조하면 황진이 빼고는 말할 수 없어
평생 수행통한 선심에서 나왔으니 선시
시조형식으로 서양에는 ‘소넷’ 중국 ‘절구’ 일본 ‘하이쿠’ 있어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조오현 무산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지만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 하인즈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詩) 언지(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詩)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조: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권 :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 주인공이십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따라서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願)과 한(恨)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공감합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다 아시다시피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 예.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시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를 한 수 읽겠습니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노래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니 부처가 돌아앉아버렸고 둘은 한 몸둥이가 되어 딩굴었습니다. 지족선사가 뒤에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립니다. 그러자 황진이가 이렇게 시조를 노래불렀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읽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지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는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 출판사에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조오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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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버클리에서 지난 20일 열린 문학심포지엄에 참석한 영진스님(앞줄 오른쪽부터. 백담사 무금선원 원장),무산 스님, 영어통역을 맡은 신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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