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
기독교의 최고의 가치는 당연히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만큼 그 고유적 의미에서 퇴색된 것도 없다. 수많은 노래와 드라마의 주제가 사랑이었고, 지구촌 사람들 숫자만큼의 횟수로 인용되고 논해져 왔던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 의미의 사랑이라는 게 이미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현된 ‘바로 그 사랑’일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갖가지 사랑‘들’은 어쩌면 이 ‘그 사랑(the Love)’의 아류 아니면 유사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속에서도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희생 없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래서 사랑을 ‘진리’라고도 말하는데(특히 요한복음에서), 진리 역시 희생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스스로 설립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랑 놀음들은 희생 없는 값싼 사랑 아니면 일시적인 사랑에 머무르고 만다. 립 서비스 수준의 사랑 고백이라든지, 하룻밤 같이 지내고 끝내는 걸 놓고 자기는 그를 사랑했다, 라고 말한다든지, 이런 건 결코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 안에 꾸준한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 말고 매년 이맘때면 우리의 입에 회자되는 게 하나 더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고난은 영어로 ‘패션(passion)’이다. 하지만 이 패션에는 다른 뜻도 있다. ‘열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뜻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 의미가 같다. 열정은 진지한 고난으로 순화되며, 고난은 불타는 열정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가장 탁월한 본을 보이신 분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그의 구원의 열정을 그의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둘을 분리시키거나, 또 둘 중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켜 이해해 왔다. 이를테면 식어가는 열정 속의 고난, 고난이 보류된 열정 식이다. 교회개척을 한다면서 복음을 향한 순수한 희생과 고난의 길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또 선교한다 하면서 자기 의(自己 義; self-righteousness)가 강한 열정 중심으로 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을 보이고, 또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진리를 세우려는 일과 같다.
한번 답해 보자. 예수가 열정의 존재였는가? 열정 때문에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졌는가? 맞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맞다. 성경을 더 깊게 관찰해 보면, 그리스도는 열정의 존재였기보다는 순종의 존재였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향한 강한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은 그의 3년 사역 내내 불타올랐다. 그래서 한때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자신들의 나라 세우기에 탐닉했던 기득권자들을 향해 독설을 내뿜으면서까지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실현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하나님의 원칙 앞에 그는 철저히 순종했다. 결국 고난의 원칙이 열정의 방식을 인도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열정은 그 자체가 제 아무리 순수한 것이어도 그 방향이 비뚤어질 때는 되레 물의를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멋진 불꽃으로 잘 타올라야 하는데 오히려 주변을 태우는 방화가 될 수도 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또 부활절이 지나고 사역의 계절이 오면, 교회 내의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기선교, 부흥회, 비전 트립, 여름성경학교 등등. 이런 사역들에 임하면서 다들 조심해야 한다. 나의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기제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라는 방향을 통해 그리스도의 ‘열정과 사역’이 순화되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교적 열정 역시 그 방향을 잘 잡아나가야 한다. 그랬을 때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열정과 고난 사이에 ‘순종’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순종이 그 사이에 있을 때 영어가 이 두 단어를 하나로 쓰고 있는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 열정의 사역자? 아니면 고난을 감수하는 인물? 둘 다 좋다. 그러나 먼저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순종의 사람만이 열정을 고난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