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탁인 보호위해 워싱턴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
이무림 전 뉴욕한인드라이클리너 협회 회장
이무림, 그를 보면 드라이클리너협회가 생각날 정도로 5년간의 회장 시절,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세탁업에 닥친 위기
이무림은 1990년부터 5년간 10~15대 뉴욕한인드라이클리너 협회 회장을 맡았다. 어느 날 불어 닥친 개정환경법은 당시 뉴욕지역 한인 세탁업소 2,500여개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무림도 브루클린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1990년 1월 회장에 선출되자마자 시련이 다가왔다. 부시대통령 행정부에서 개정환경법(Clean Air Act Bill)을 상하 양원에 제출한 것이다. 퍼크(perc)세제가 인체에 해롭고 암의 원인이 된다고 사용금지, 주택지역으로부터 150피트 이내에 업소가 영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악법이었다.”
생계를 위협받은 미 전국의 1만 2,000여 업소가 들끓었다. 이에 이무림은 뉴욕환경업체, 업계 대표, 기계업자 모두 모여 회의를 했고 임원들과 함께 워싱턴 D.C와 알바니 의회에 가서 수많은 의원들을 직접 만나 법의 부당성을 인지시킨 후 많은 부분을 완화시켰다. 이후 각 주마다 알맞는 환경법을 15개월 이내에 발의하여 시행키로 되었다.
미국 세탁협회, 한인세탁미주총연(1996년 부회장 이무림)과도 긴밀히 협조했다.
원래 이탈리아계와 유대계가 장악하고 있던 세탁업계는 70년대 중반 근면성과 손재주를 자랑하는 한인들이 가세하며 5개 보로와 롱아일랜드, 업스테이트에 한인운영 세탁소가 늘기 시작했다.
78년께에 한인세탁소 30여개, 80년에 수백 개 업소, 90년에는 엄청난 숫자로 늘었다. 이에 78년 뉴욕한인드라이클리너협회가 발족했고 뉴욕한인의 주요 비즈니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시 집은 스태튼 아일랜드이고 세탁소는 브루클린에 있었다. 2년동안 일주일에 2~3번은 워싱턴 DC로 올라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세탁소 문 열고 7시반에 알바니나 워싱턴DC로 출발했다. 다행히 아내가 세탁소를 맡아 일해 주었다. 그날 밤 돌아와서 오버나잇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퍼크 사용 밀실을 지어 그 안에서만 세탁을 해야 했고 밀실 사용자는 자격증을 지닌 오너와 오너 매니저 두 명으로 제한했다. 협회는 영어로 된 자격시험을 한국어 시험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미국세탁협회에서 자격증 교육을 받기도 했다.
▲“소신대로 하니 괜찮아”
“자동차 한 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고속도로를 오르내렸고 언론을 통해 교육을 했는데 당신 때문에 세탁소 크로징 못했다는 항의전화도 받고 이무림이 로비를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등 원망도 들었다. 그래서 퀸즈의 한 식당에 날을 잡아 다들 모이게 했다.
올바니로 갈 때 가져간 한 보따리 되는 서류를 앞에 놓고 상황설명을 했고 NCA(미국세탁협회) 사무총장이 참가하여 이무림은 모임에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소신껏 일하는데 그런 말쯤 얼마든지 들어도 괜찮았다.
다만 어떤 법안이 우리를 위협하면 각각이던 회원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
또한 이무림은 1994년 미주 한인 최초로 세탁장비 전시회를 개최 했으며 점차 한인세탁업소들은 물 또는 하이드로카본 등을 사용하는 세탁기로 전환되어 갔다. 그 결과 섬유의 촉감이 좋아지고 앨러지 반응도 크게 줄었다.
이무림은 회장으로 재임한 후 다시 5년간 전직 회장으로서 원로협의회를 결성하여 후배 회장을 도와주었다고 한다.법규의 혼란함과 가속화되는 경쟁 속에 회원들간의 화합과 협력에 힘써온 이무림은 1998년 뉴요커 클럽의 인종화합상, 1997년 한인사회를 빛낸 인물상 등을 받았다. 이무림은 이외에도 1989년 재외 대한민국 ROTC 문무회장, 1996~1997년 고려대 뉴욕교우회 회장, 1997~98년 대학총연회장, 평통뉴욕지회 6기, 11기, 14기 위원들을 지냈다.
▲동네 메이어로 불려
이무림은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대문 금화초등학교, 광희중, 경기상고를 거쳐 1959년 고려대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ROTC 1기로 65년 소위로 예편후 서울신문사 견습기자로 합격했으나 철강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의 사업체에 들어가 일하면서 고려대 경영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이때 정부는 코트라(KOTRA) 수출학교를 열었고 60명이 6개월 훈련을 받았다. 이무림은 학교 수료후 무역사 제1기 국가고시에 합격, 조광 알루미늄에 입사했다. 입사한 첫 해 수출부 창설 최초로 5만달러 수출신용장 선적, 구로동 제1수출산업박람회에 참가하여 해외 바이어 확보에 성공하는 등 여러모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70년초 가발수출업체인 삼정통상으로 이직하여 9년간 무역부장으로 수출입 업무에 종사, 76년 가발이 사양사업이 되면서 해외로부터 수입된 모피 가공을 하는 아이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때 회사를 방문한 미국 모피회사 코작의 초청으로 뉴욕에 오게됐다.
76년 삼정통상 뉴욕 지사장으로 가족과 함께 도미했고 맨하탄 브로드웨이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영주하기로 결심, 78년 브루클린 십쉐드베이 지역에 서양 그로서리를 인수하여 7년반동안 경영했다.
“뉴욕에 폭설이 왔던 해에 동네의 시니어들이 빵과 우유를 사러 나올 수가 없었다. 밀크차가 오자마자 따로 한 콘테이너를 보관해 두었다가 아파트로 배달해 주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나를 동네 메이어(Mayor)라고 부르면서 장보러 가는 시간이면 가게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가게를 지켜주곤 했다.”
동네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인심을 얻었던 그는 84년 세탁업으로 전환, 2002년까지 영업한 후 뉴저지로 이전했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소규모로 세탁소를 한 후 2011년 은퇴하였다.
▲효자 효부상 받다
“고등학교 시절 시를 썼다. 대학시절 고대신문에 시도 투고했는데 당시 시 ‘승무’로 유명한 조지훈 선생이 계속 시작을 하라고 권했다. 대부분 친구들이 은행원, 변호사, 의사가 되려던 시절이었고 자연히 나도 수출역군으로서 삶을 시작했다. 아직 그 감성이 남아서 가끔 시를 쓴다”고 수줍게 웃는 그다.
이무림은 아내 강정자와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현철은 9.11뮤지엄 전속사진작가, 차남 진섭은 컴퓨터 그래픽 작가며 손자손녀 각 한명을 두었다. 아내 강정자씨는 당뇨 합병증으로 시각장애가 온 시아버지를 위해 사골국물에 오트밀을 넣은 특식과 샐러드 요리를 개발, 2002년 84세로 별세하기까지 수십년을 봉양, 1999년 효부상을 받았다. 그 역시 같은 해 효도회로부터 효자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 96세 시어머니는 효성이 지극한 6남매가 돌아가면서 모시고 있다.
“장남인 내가 30년이상 부모님을 모셨는데 지금은 우리집 근처 큰딸 집에 사신다.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다는 전화를 하면 무조건 네 가겠습니다 하고 달려간다.”
그는 ‘2세들이 부모의 고통을 잘 모르고 있다. 나이가 들면 아픈 데가 많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좀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는 바람을 말한다.
이무림은 뉴욕생활 30여년후 2011년 94세 노모를 따스한 지방에서 모시고자 2년간 서부 애리조나로 이주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뉴욕에 사는 자식들을 그리워 해 다시 뉴저지로 이주, 현재 브론스윅에 살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두어번 골프 치고 커뮤니티 센터 프로그램에서 컴퓨터 기술 등도 연마하며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수가 나도 제값을 받아야지, 덤핑 하지 말아야 한다. 각종 규제법을 힘을 모아 잘 이겨내고 차세대까지 대물림 할 수 있도록 사업을 체계화 시켜야 한다. ”
세탁업 출신으로서 한마디를 잊지 않는, 이무림의 생활신조는 ‘의리’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의리’라는 말에 소박한 진실됨이 느껴진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