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어선 한국 무역발전, 늙어선 조국사랑 ‘기수’
<사진=이경하 기자>
코트라 뉴욕무역관서 근무, 한국상품 수출에 공헌
“일 좋아했고 능력도 있어...내 라이프에 시간낭비란 없어”
한국식 ‘지산법’ 미국에 보급, 미 교육계서 히트하기도
미국에 살면서 두고 온 조국과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 산다고 해서 탯줄을 묻은 땅을 잊고 살 수도 없다. 이민 38년차 이정공의 풍요로운 삶 이야기를 듣는다
▲친목과 단합이 우선
“조국사랑미주연합회는 조국을 사랑하며 동포들의 권익을 위해서 창립된 자생적인 단체로 현재 북미주지역에서 30여명이 중추적 멤버이고 60~70여명이 자문위원이다. 2012년 참정권 시대를 맞아 결성되어 뉴욕을 중심으로 LA, 워싱턴, 시카고,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 20여개 지부가 있다. ”
이정공이 회장으로 활동하는 이 단체는 친목과 단합을 우선으로 새로운 사업을 찾아 추진하며 건설적으로 동포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작년 5월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내 한식당에서 서울확대회의를 열자 한국의 유명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등 한국과 미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국사랑미주연합회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대뉴욕지구 한국대학동문 총연합회 활성화에 대한 공이 크다. “2000년대에 5년동안 하루 2시간 반 정도 대학 총연 웹사이트(NYCY.org)를 관리했다. 각 대학동문회 사이트와 연결돼 동문회 활동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신호등 역할을 했다. 장학정보 사이트, 자녀들의 배우자 찾기에 도움이 될 오작교 사이트, 회원 친목과 웰빙생활 정보 등도 함께 제공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하다 보니 밀린 정보 업데이트로 며칠씩 두문불출한 적도 있다. 일에 빠진 노예처럼 살았다. 그렇게 유지해온 웹사이트가 지금은 없어졌다. 작년부터 김영길 회장의 활약으로 총연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
평소 친화력이 좋은 이정공은 2001년 맥박이 끊어졌던 총연을 회생시키고자 총연 전회장들과 11명의 열성임원으로 이목회를 조직, 회장인 그로 인해 총연이 획기적으로 소생된 일이 있다. 골프를 중심으로 한 친목은 지난 1월말 12명이 5박6일 멕시코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로 화합과 단결력이 강하다.
그는 Korean merchant Club/S.Queens 창설 회장으로 1991년~2007년까지 지역사회 협력 및 후원을 했고 한미상공회의소 이사(1996~1999), 고려대학교 뉴욕총동창회 회장(2000~2002), 뉴욕지구 한국대학 동문총연합회 회장(2004~2006), 뉴욕한인회 부이사장(2003~2005), 뿌리교육재단 이사/감사(2005~2009)를 지냈다. 2009년부터 민주평통 위원, 뉴욕한인회 이사도 맡고 있다.
▲코트라의 ‘홍길동’
1943년 10월9일 전남 광주 태생으로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을 본적으로 한 이정공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자라났다. 금융조합(중소기업은행의 전신) 이사인 아버지는 3형제 중 막내아들을 귀히 여겼고 그는 어린시절 온갖 취미를 다 누리며 성장했다.
관사 뜰이 넓어서 흰쥐, 다람쥐, 토끼, 비둘기, 새, 자라, 거북 등 60~70마리의 동물뿐만 아니라 온갖 화초를 다 키웠다. 학교에서는 어서 집에 가서 동물들 먹이와 약, 화초 물 줄 생각에 분주하다보니 당시 받은 통신표에는 ‘주위가 산만함’으로 기록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정공은 석교 초등학교, 경남중,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의 애국심이 부쩍 키워진 동기는 69년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KOTRA) 부참사로 해외 바이어 거래알선을 전담하며 한국의 무역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하면서였다.
1969~1974년 시카고 무역관 부관장으로 1년간 근무한 후 1975~1977년 뉴욕무역관에서 2년간 근무했다. “무역을 하고 싶어도 잘 모르는 한인들을 위해 수출입관계 세미나를 열어 무역관세, 시장 조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했다. 수출입 업체에게는 미국 바이어 대상 마케팅, 홍보 방법을 지도하고 한국 영세업체가 뉴욕에 오면 호텔 예약 및 체류지원, 상담까지 모두 도와주었다. 물론 클레임 해결도 했다.”
당시 패기가 넘치는 젊은 이정공은 수출입 상품의 명칭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재치가 있어서 바이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홍길동’, 많은 이들에게 상품 판로부터 통역, 일이 성사되기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기 때문이다.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 5~6월이면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는 보릿고개가 있었고 이를 없애기 위해 정부는 정책적으로 무역진흥에 많은 신경을 써 코트라는 우리 상품을 판매하고자 외국인 초청 상담이 빈번했다.
당시 한국 무역 진흥 소식을 알리는 대한 뉴스에 그는 단골로 나올 정도였다니 그의 활동상을 알만하다. 뉴욕에 서울통상, 삼성, 현대, 대우 등 20여개의 지상사가 있었고 파견원도 많지 않은 시절, 코트라는 뉴욕한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한국 수출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정공은 뉴욕 근무 후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인재 유출을 우려한 정부의 출국정지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이미 77년에 미주조직망 재개편안, 전미주 전산화망, 보세창고 운영방안, 전미주 건강보험안 등 여러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할 정도였다. 그 해, 결국 상공부, 법무부, 외무부, 정보부 4개부처 장관이 승낙한 여권을 만들고서야 출국할 수 있었다.
“일을 좋아했고 소화해 낼 능력이 있었다. 스스로 과정을 즐기고 내가 구성한대로 생각을 맞춰나가고, 잘되면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내 라이프에는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다. 본 것, 체험한 것이 많다보니 스스로 나에 대한 기대도 많았다. 나중에 그것을 접느라고 마음고생 많이 했다.“
▲지산법으로 미 교육계 흔들어
미국으로 온 이정공은 Chisanbop(지산법) Inc 사장/부회장으로 들어갔다. 한국인 배성진이 개발한 지산법(指算法)이 미국으로 보급되며 미국 교육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를 토대로 세운 회사였다. 이정공은 자본을 투자하여 수판과 같은 손가락 계산방법으로 산술 초보를 가르치는 지산법 음반을 만들었고 80년대초 150만개가 팔릴 정도로 TV 세일 아이템의 최고 힛트상품이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 ‘신기한 동양의 계산법’ 특집이 나오고 NBC-TV, 도나휴 쇼, 굿모닝 쇼, 자니카슨 쇼 등 수많은 프로에서 소개가 되며 돈이 쏟아져 들어오자 경영주는 돈을 챙겼고 78~79년 그가 회사를 그만 둘 즈음 지산법은 전자계산기에 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정공은 1978~1980년 타 코마 조선(주) 전략자원부 부장대우, 1981~1986년 F.A. Potts Inc 부사장으로 석탄, 자원, 장비 등 국제입찰 담당으로 일했고 스스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퀸즈와 롱아일랜드 접경지역에 세탁소를 연지 20여년째다. 세탁물 가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5분 만에 쉽게 알 수 있도록 컴퓨터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그가 1991년부터 운영 중인 세탁소(Daisy fresh Drive In Cleaners Inc)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5년 전부터는 미전국 세탁소보험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보험회사 NIE(National Indemnity Exchange) Advisory Committee 멤버이기도 하다.
▲사필귀정
이정공은 서울의대 간호학과를 나온 간호사 출신 최정애와의 사이에 교육학 석사를 한 존, 인터내셔널 파이낸싱을 공부한 찰스 두 아들을 두었다. 설을 맞아 한인사회가 한단계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그는 지난 1월 조국사랑미주연합회 신년하례식에서 정한 사자성어를 들려준다.
“원로 단체장과 올드 타이머들이 모여서 다음 세대들과 경험을 나누고 지켜야 할 사자성어를 정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가기 마련이다는 뜻을 지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
젊어서는 한국 상품을 외국에 팔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국 사랑에 앞장서는 그다. 하지만 그 어떤 활동보다도 골프(핸디캡11), 바둑(아마 4단), 탁구, 정구, 기타 연주 등 다양한 취미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