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래도‘희망’이다

2014-12-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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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크의 창

그래도‘희망’이다

김종하 사회부장·부국장 대우

2014년도 이제 엿새 밖에 남지 않았다. 책상 옆에 켜켜이 쌓인 신문들의 무게감을 느끼며, 올들어 지금까지 사회부 데스크를 거쳤던 수많은 뉴스와 스토리들을 되새겨본다. 희망적이고 따뜻한 소식들도 많았지만, 반추하기에 가슴이 무겁고 답답한 일들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매년 연말이면 한국에서 나오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이번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선정됐다고 한다. 사슴(鹿)을 가리켜(指) 말(馬)이라고 하는(爲)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같이 속임수와 억지가 횡행했다는 진단일 게다. 본질은 호도되고 진실 규명이 외면되는 일방통행 상황들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올들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른바 ‘땅콩 회항’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빗대어 이처럼 사자성어가 맞아 떨어지는 해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이를 두고 온 사회가 양분돼 그 갈등의 평행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점도 답답하다.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운 채 억지와 고집이 난무하는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연초부터 거의 일 년 내내 티격태격 내분과 다툼을 계속해오고 있는 한미동포재단 사태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한인회관 건물을 관리하는 이 재단은 그동안 이사들이 두 편으로 갈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싸우는 통에 파행을 거듭하면서 사무실 점거 사태 등을 반복하더니 결국 아직도 법정 공방을 벌이며 해를 넘겨 분열 양상을 계속할 태세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상식에 반하고 잘 이해되지 않아 억지라고 느껴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던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커뮤니티의 여론과 질타에도 눈을 감는 상황이니, 생경한 ‘지록위마’라는 표현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다가 자기의 주장이나 조건에 맞추는 ‘견강부회’, 자기만 이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식의 ‘아전인수’ 등이 이에 더욱 어울리는 사자성어일 것도 같다.

물론 답답한 소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말이면 더욱 쓸쓸함과 허전함을 달래야 하는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의 사연을 전한 본보 보도 이후 이들을 돕겠다는 한인들의 후원의 손길이 쇄도하고 있다는 스토리는 훈훈함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15년 전 도미했다가 불법체류 신분으로 전락한 후 이민법의 245(i) 구제 조항에 해당돼 미국에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은 갖췄지만 수수료와 벌금 등을 납부하는데 필요한 7,000달러를 마련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온 한인 가정은 한인들이 쾌척한 후원금으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게 됐다.

또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손자와 손녀에게 반찬을 만들어주기 위해 푸드뱅크에서 받는 식료품까지 되팔아야 하는 한인 할머니의 딱한 처지에 한인들은 이심전심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이밖에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매년 연말마다 ‘남몰래’ 선행과 기부를 해오고 있는 한인 기업가, 20년째 ‘익명의 장학금’을 쾌척해 온 한인 여성 직장인 등의 스토리도 우리 커뮤니티가 각박하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곳임을 일깨워주는 작은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며칠 후면 시작되는 을미년 새해에는 합법 체류신분이 없는 이민자들도 캘리포니아에서 공식적으로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또 추방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이민개혁 행정명령 시행 구체화가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뭔가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을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새해에는 한국이나 이곳 한인사회나 모두 ‘지록위마’와 같은 사자성어로 상징되는 부정적 모습들은 깨끗이 털어버리고, 서로 뗄 수 없는 수레의 몸통과 바퀴처럼 상호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보거상의’, 그리고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는 ‘역지사지’ 등이 우리를 규정하는 사자성어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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