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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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첫날 단상

2014-10-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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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길 의사

말이 은퇴지 정말 믿기지 않는 은퇴가 며칠 전 밤 자정을 기해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한편 생각하면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금 같은 70대 초반의 처음 2년여이기에.

어차피 2-3년 더 일하다 은퇴하려 했었으니까 이제 2-3년 더 빨리 현실화 된 건 인생에서 결코 손해가 아니고 크나큰 축복임이 틀림없겠다.

누가 앞일을 훤히 알 수 있을까? 2-3년 안에 무슨 일이 생길 지, 그때 가서 후회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건강하고 사람들이 가지 말라 붙잡을 때 떠나는 것이 아마도 축복받는 떠남의 시점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떠날 최적의 시기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실패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늘 말해 오지 않았는가? 어려움이 오히려 도약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고 늘 들어오지 않았는가?허나 이런 일들은 모두 거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마음먹기와 그에 버금가는 행동과 노력 여하에 달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날 하루를 축복인지 위로인지 모를 두세 개의 간단한 파티에 초대되고 덕담들을 듣고 자정을 기해 자식뻘 되는 후임자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직장을 떠나며 밤하늘에 우뚝 서 있는 정든 병원을 보니 만감이 오갔다.

많은 좋은 추억들을 뒤로한 채 그동안 정든 익숙한 퇴근길에 접어드니 참 우연히도 자동차 라디오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은퇴 첫 순간을 음악과 함께 시작한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참 우연히도 ‘운명’과 같은 느낌이다.

은퇴 첫날 아침 집 뒤 패티오에 죽어 있는 참새를 발견하고 뒤뜰에 묻어주었다. 또 부슬비를 그대로 맞고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손자뻘 되는 이웃집 초등학생에게 내 우산을 빌려주고 승차할 때 그대로 놔두면 내가 찾아가겠다고 했다. 작지만 이웃배려로 은퇴 첫날을 한껏 잘 장식한 것 같다.

정오 경엔 집사람의 수채화 개인전 마감 날이어서 잔심부름을 했다. 오후에는 고교 때부터의 친구와 함께 지냈다. 한국에 사는 그가 딸의 집에 와 워싱턴에 체류하고 있다. 컴퓨터 프로나 다름없는 그 친구로부터 컴퓨터 강의(?)를 듣고 김치찌개와 오징어 튀김을 안주로 삼아 대작하며 정말 뜻있는 하루를 마감하게 돼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 친구는 내 컴퓨터 실력이 유치원생 정도라고 평가하며 그 실력으로 글 쓰고 신문에 기고 하는 것에 놀란다.

앞으로 남은 날이 20년이라면 과욕이 될까? 어찌됐든 은퇴 첫날인 오늘처럼만 매일 매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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