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100년 전 강남학생

2014-05-05 (월)
크게 작게

▶ 다니엘 홍 / 교육전문가

1900년 무렵, 독일의 작은 마을에 한스 기벤라트라는 소년이 살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스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 교사들,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런 한스 앞에 놓인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즉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뒤 교수나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골드만 삭스에 취직해서 투자 컨설팅을 하거나 메디칼 스쿨을 거쳐 의사가 되는 것이다.

한스는 주변 사람들의 희망대로 공부에 매진했다. 오후 4시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그리스어 과외, 6시에는 목사님으로부터 라틴어와 종교 과목을 지도 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특별과외를 받았다. 100여년 전 독일의 시골에서 오늘날 강남 지역의 학생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래도 한스는 가끔 산책을 나가고 낚시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휴식시간에도 한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결국, 좋아하던 낚시를 그만두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매진하는 한스의 모습을 보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오직 구둣방 주인만이 그를 애처롭게 여기고 “밖에 나가 운동도 하고 쉬기도 해야 할 학생이 그렇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며 혀를 찾다.

한스의 노력의 결과는 신학교 차석 입학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 누구보다도 한스의 아버지는 “이제 탄탄대로가 열렸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스는 두통과 우울증으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는 엄격한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게다가 공상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한스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고 성적도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한스를 모범생으로 여기던 신학교 학장이 한스를 불러 타일렀다. “낙오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아!”

남에게 뒤쳐지면 죽는다는 세상에서는 뒤처진 자가 우월자가 굴리는 수레바퀴 아래 깔린다는 논리만 존재한다. 결국 신학교에서 친구 하일러는 퇴학을 당하고, 친구를 잃은 한스는 절망에 빠져 강의실에서 쓰러지고 만다. 신경쇠약으로 휴학을 결정한 한스는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고, 자신에게 온갖 기대를 건 아버지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영웅에서 평범한 존재로 전락한 한스를 바라보는 교장, 교사,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느낌을 극복해보려고, 한스는 옛 친구를 찾아가 수습 기계공 일자리를 부탁했다. 일을 하며 한스의 손은 퉁퉁 부었고 몸은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을의 희망으로 불리던 학생이 이제는 초라한 작업복 차림으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일요일 한스는 동료들과 함께 야외에서 술을 마신 후, 혼자 집에 가겠다고 비틀거리며 나섰다. 한참 후,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한스의 죽음이 자살인지 실족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우연을 가장한 사회적 타살일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4장은 이렇게 암시하고 있다. “국가나 학교가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선생님에게 미움이나 벌을 받은 학생들, 학교에서 도망치거나 내쫓긴 학생들, 바로 이들이 나중에 사회의 보배가 되는 것을 흔히 본다. 하지만 더러는 무언의 반항으로 자신을 소모하고 파멸에 이르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