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란 원래 스페인어로 전쟁이란 뜻의 Guerra(스페인어 발음은 게르라)에서 파생된Guerrilla(작은 전쟁이라는 뜻)로 스페인 발음은 게르릴랴인데 영어로 발음하게 되면 게릴라가 된다.
이 단어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부터이다. 당시 프랑스 대군을 상대로 스페인의 소규모 부대가 치고 빠지는 식의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법으로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전세를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이 속한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다.
그 후, 세계인들에게 게릴라전이라는 단어가 알려졌는데 오늘날에도 분쟁 지역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법으로 사용된다. 그러면 나폴레옹 시대인 당시의 상황으로 함께 돌아 보기로 하자.
연전연승을 하며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영국을 제압할 1차 단계로 영국과의 모든 무역 거래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이에 불응하고 영국과의 무역 거래를 지속하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를 이유로 스페인에 프랑스 대군의 통과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1807년, 리베리아 반도에서 전쟁이 반발하였는데 이를 La guerra de la Peninsula ‘반도전쟁’이라고 일컫는다.
이에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도피하게 되고 같은 해 11월 30일, 나폴레옹의 3만 병력은 스페인을 통과하여, 리스본을 점령하였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이자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로 인해1808년 5월2일, 스페인 전국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곧바로 스페인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잘 정비된 프랑스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 군은 게릴라 전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게릴라 전이 큰 효과를 보이며 프랑스 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게 되었다. 프랑스 군은 발렌시아에서 퇴각했으며, 안달루시아로 진군했던 프랑스의 뒤퐁 장군도 퇴각하게 되었다. 7월23일, 수도 마드리드로 진군한 스페인 군은 8월에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몰아내고 임시정부를 세울 수가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20만 대군이 마드리드를 재탈환하는 바람에 스페인 임시정부는 세비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08년 8월 1일,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함으로 대등해진 양쪽 병력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고 전쟁은 갈수록 지루한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프랑스 군은 후방 스페인 게릴라전으로 인한 피해로 물자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도 나폴레옹은 모든 전력을 대 러시아 전에 쏟고 있던 터라 반도 병력의 일부를 러시아 전으로 차출하기까지 하였다.
프랑스의 고갈된 병력은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1813년 6월 21일, Vitoria(비토리아)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마지막으로 물리침으로 반도 전쟁을 종결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조세프 보나파르트 왕가도 스페인에서 철수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나폴레옹은 그의 회고록을 통해 - 반도전쟁은 궤양인 스페인의 게릴라 전으로 인한 패전이었다고 회고를 하였는데 이 때부터 게릴라 전이라는 이름이 세계 전쟁 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John Kim의Spanish Class(323)346-7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