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래된 주전자

2013-05-21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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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유리주전자 새까맣게 타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정 다혜( 1955- ) ‘오래된 주전자‘ 전문

몸통이 찌그러지고 입이 부러진 주전자 속에 물이 끓는다. 끓는 것은 그러나 물이 아니라 돌아와 펑펑 우는 오래된 추억이다. 쉬쉬쉬 소용돌이치며 깨어나는 첫사랑의 기억, 옛 친구의 모습, 우리가 떠나보낸 시간이며 우리를 버리고 간 기억들이다. 잘 깨어지는 유리 주전자는 모를 것이다. 저 깊은 망각의 어둠 속에서 추억을 불러오는 낡은 주전자의 비법을.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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