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타 배우기

2013-03-28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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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범 수 <치과의사>

내가 할 줄 아는 악기는 기타뿐이다. 그것도 고등학생 때 서너 달 배운 게 전부다. 참고서 산다고 부모님을 속여서 타낸 돈으로 나는 광화문 뒷골목 기타 학원에 등록을 했다. 너어어의 치임묵에에 메마아른 나의 입수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간단 기타 코드를 처음 배웠는데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단숨에 곡을 떼고 다음 곡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배웠다. 기타 치는 사람들이 다 할 줄 아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딩다랑 딩다랑 칠 때쯤 되어서는 교과서를 펼쳐도 글자들이 기타 코드로 보였다.

‘기타는 나의 인생! 내가 이러다가 세고비아 2세가 되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꿈으로 부풀어갈 무렵, 기타 학원에서 집으로 수강료가 밀렸다는 엽서가 날아오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수험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부모님의 불호령과 함께 나의 꿈은 사라졌다. 입시준비로 청춘이 갔다.

기타 말고 할 줄 아는 것은 띵 띵 똥 똥 두 손가락으로 치는 피아노다. 막내 누나가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연습과정을 지켜본 나는 일찌감치 항복했다. 누나의 두 손이 건반을 두드리고 쓸어 담고 눌러대고 때로는 두 팔이 엇갈린 채 건반 위를 수많은 음표의 소나기로 퍼부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을 뿐, 지금 나는 두 손가락으로 ‘고양이의 춤’을 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음악이 들린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음악 애호가들이 하는 얘기다. 눈을 감으면 온몸으로 들리는 두 곡이 바로 드뷔시의 월광과 베토벤의 월광이다. 달빛은 시인들의 가슴만 울렁거리게 한 것이 아니라 두 천재 작곡자의 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100~200년 전(베토벤은 1801년, 드뷔시는 1890년에 작곡) 당시 서른 살 남짓의 젊은 두 남자가 살고 있던 유럽의 한 모퉁이, 검은 피아노가 놓인 방을 떠올린다. 드뷔시의 곡에 아름다운 제목을 얹어줄 수 있도록 영감을 준 것은 베를레느의 시 ‘하얀 달’ 이라고 한다. <하얀 달이 숲속에서 빛나네 나뭇가지마다 무성한 잎사귀 그 사이로 흐르는…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별들이 빛나는 저 하늘에서 고요한 평안이 내려오네 아득하고 먼 먼 시간…>

베토벤의 창문을 두드린 달빛과 오늘 내가 누워 있는 이 방의 창문에 살짝 걸친 저 달은 같은 달인가? 한 젊은이는 그 달빛을 받아 사람의 혼을 앗아갈 소나타를 만들고 200년 뒤, 50대의 한 사나이는 창문 너머 조각달을 보며 그 음악을 듣는다. 이 제목 역시 음악평론가 한 사람이 스위스 루체른 호수에 비친 달빛을 그리며 선사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멜로디를 만드는 아름다운 음표 하나하나는 어디서 왔을까? 세상 어딘가에 음의 저장창고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음은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눈에 보일 수도 없겠다. 그저 바람 속에, 달빛 속에 떠돌아다니는 음정을 상상의 손으로 잡아끌어다가 다섯줄 음악노트 위에 매어두었을 뿐이다. 높고 낮게, 길고 짧게, 강하고 약하게. 그리고 거기에 화음을 곁들여.

도-미-솔-도 솔-시-레-파… 아름다운 화음들이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자가 만들어낸 음계 안에서 나를 매혹시킨다. 나는 이번 봄부터 다시 기타를 배우려고 한다. 달빛 창가에서 나도 혹시 노래를 부르면 좋지 않겠는가. <만유의 주재~~ 광명한 해와 명랑한 저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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