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가주서 마지막 건축… 멕시코풍 물씬

2013-01-18 (금)
크게 작게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 샌프란시스코 솔라노

오늘날의 소노마시의 중심 광장에 위치해 있는 미션 샌프란시스코 솔라노(Mission San Francisco Solano: 성자 프란시스코의 양지 미션이라는 뜻)는 캘리포니아 미션 중 제일 마지막인 21번째로 지어진 것으로 유일하게 멕시코 시절의 건축물로 남아 있는 곳이다.

당시 미션 돌로레스에서 사역 중이던 스페인 출신의 야심찬 젊은 신부 호세 알티미라(Jose Altimira)에 의해 추진됐는데, 그는 자기가 직접 건립하고 관리하는 성당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가 찾아낸 방법은 이랬다.

안개와 비가 많은 샌프란시스코의 날씨 탓에 발생하는 병 때문에 수많은 인디언 세례자들이 죽어간다는 호소문을 시작으로 빈약한 농토에서 나오는 식량으로는 미션 식구들이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서신을 수차례 걸쳐서 몬트레이의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보냈다.


이미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는 많은 인디언 환자들을 위해 미션 샌라파엘 병원을 운영 중이었으나 호세 알티미라 신부는 막무가내로 더 북쪽에 위치한Sonoma 지역에도 새로운 미션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의 주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미션은 이미 두 개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노마 지역이 러시안들이 점거한 로스(Ross) 요새가 아주 가까워 대외적으로도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영토임을 러시아인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주정부는 고심 끝에 호세 알티미라에게 새로운 미션 건립을 허락했다.

주정부의 허락을 받아낸 알티미라신부는 1823년 7월4일, 11명의 인디언과 1명의 군인 기술자를 데리고 소노마를 찾아 8월 내내 공사를 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승낙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당시의 캘리포니아 가톨릭 수장이었던 사리아(Sarria) 신부는 분노와 함께 즉각 미션 건설 중지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직접 사리아 신부를 설득하기 시작하여 ‘San Francisco Solano’라는 이름과 함께 가톨릭 교회의 허락을 받아 내었던 것이다. 이 미션명은 페루 탐험에 참가했었던 성인‘ San Francisco Solano’에서 따왔는데 그의 이름 가운데 햇볕이 잘 든다는 의미의 솔라노가 그 지역에 적합하다 판단되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젊은 알티미라 신부는 1824년 10월에 교회 건물을 완성할 수가 있었는데, 첫 미사에 482명의 인디언들이 참석하면서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나 3년 후인 1827년 미션에 불만을 품은 인디언들이 교회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교회가 전소되었고, 겁에 질린 젊은 알티미라 신부는 교회를 탈출하여 방황하다가 결국 스페인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후임을 맡은 포르투니(Fortuny) 신부는 노련함으로 인디언들의 오해를 풀고 설득시킴으로써 1832년 전보다 훨씬 더 큰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2년 뒤인 1834년 멕시코에서 교회의 사유재산을 거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정책이 발표되자 소노마에서는 마리아노 바예호 장군이 앞장서서 이를 실천하였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악용했다.

1846년 인근지역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흰색 바탕에 곰 그림이 있는 캘리포니아 공화국 국기를 게양하기도 했던 곳도 바로 이 광장이다.

1849년 골드러시 때의 San Francisco Solano 성당은 술집 살롱이 되었다가 현재는 주 정부 관할의 역사 보존지역이 되어 관리되고 있다.

John Kim의
Spanish Class
(323)346-7749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