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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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중심지 호수, 도착한 날 의미 맞춰‘고통’명명

2013-01-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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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1769년 11월4일 스페인 탐험대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머물렀던 곳은 작은 호숫가였는데 그 호수에 도착한 날이 가톨릭에서 말하는 ‘어머니의 고통의 날’이어서 호수의 이름을 ‘고통’ ‘아픔’이라는 뜻으로 Lago de Dolores(돌로레스 호수라는 뜻)라고 지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이 작은 호수는 흙으로 덮였고 샌프란시스코시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위를 지나는 길 이름도 바로‘ 고통의 길’ (Dolores street)이라고 명명 되었다.

그 후 7년이 지난 1776년 3월28일 후안 데 안사(Juan de Anza) 대령이 이끈 정착민과 함께 미션팀이 육로를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바로 그 돌로레스 호수자락에 샌프란시스코 데 아씨씨 성당(Mission San Francisco de Asis)과 함께 마을, 그리고 스페인군 요새를 만들었다.

이 미션은 탐험대 소속이었던 프란시스코 팔로우 신부와 호세 모라가 대위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샌디애고부터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 시작된 엘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의 여서 번째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었다.


돌로레스 호수자락에 세워진 교회라고 해서 미션 돌로레스(Mission Dolores)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처음에는 통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작은 성당에 불과했지만, 네 번에 걸친 이전 끝에 1785년 다섯 번째로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팔로우 신부가 멕시코로 돌아가는 바람에 건축 기술자 출신의 마르틴 신부와 안토니오 신부가 후임으로 내정되었는데, 이들 신부들의 혹독한 강경책으로 인하여 미션 건설 현장의 인디언들이 노동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쓰러지기 시작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지역의 안개와 가랑비가 계속되는 습한 날씨로 인해 홍역과 페렴이 창궐하면서 면역성이 없었던 수많은 인디언들이 이로 인해 사망하였다.

당시 병에 걸려 죽은 인디언들의 수가 6,000명에 이르렀는데, 이 숫자는 당시 미션에 살던 인디언의 75%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인디언들에게는 성당 이름 그대로 고통의 미션(Mission Dolores)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1812년 햇빛이 잘 들며 맑은 기후를 갖은 장소를 물색해서 급조된 병원 겸 성당 건물이 바로 금문교 건너 샌프란시스코 북쪽 지역에 위치한 샌라파엘 미션이었던 것이다. 그 후, 수백 명의 인디언 병자들을 북쪽의 샌 라파엘 미션으로 이동시켜 그곳에 병리 수용되기 시작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1834년 피오피코 멕시코 주지사가 이 미션을 매각하고자 했으나, 아무도 구입하지 않자 10여 년 간이나 방치됐고, 1849년 골드러시 시절에는 술집과 경마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1858년 제임스 부캐넌 미대통령 시절에 가서야 가톨릭 교회에 반환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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