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겨울 들판, 이상교)
12월은 모두가 쉬는 중인데 나만 바쁜 것 같다. 겨울엔 들판도, 풀도, 나무도, 햇볕마저도 느릿느릿 쉬어 가는데 나는 여전히 눈에 핏발을 곤두세우고 쫓기듯 살아간다. 마음이 바쁘니 몸도 아프고 사지가 쑤신다. 새벽에 출근해 회의장과 현장을 정신없이 돌다가 저녁이면 야간 한의대로 시간 반을 걸려 내려간다. 수업이 끝나 돌아오면 거의 자정 가까운 하루가 이젠 일상이 되었다.
모처럼 주일 새벽에 일어나 잠시 기도한다. 그리고 책장에서 엔도 슈사꾸의 ‘마음의 야상록’을 꺼내 편다. ‘자기(自己) 만들기’라는 첫 제목이 보인다. “자기 안에는 두개의 자기가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와 자기도 모르는 자기. 이 중에 누가 진짜 일까?” 하고 묻는다. 이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이 들면서 쉬엄쉬엄 여유 있게 살아가고 싶은 나와 마지막 순간까지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뛰어가는 나. 그 어느 쪽이 진짜 일까?
엔도 슈사꾸는 심야에 무언의 전화(電話)를 받는다고 했다. 4년여 ‘따뜻한 마음 있는 병원을’ 이란 캠페인을 벌이며 외로운 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열심히 하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건 전화를 자기가 받았다고 한다. 그 전화를 통해 자기가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란 과거에 열등한 자가 그 입장을 극복할 때 역으로 자신의 우월감을 보여주려는 심리를 말한다. 엔도는 오랜 입원생활에서 건강에 대한 콤플렉스를 계속 지녀왔는데 좀 낫고 나니 이젠 환자를 돕는 일을 통해 역으로 자신이 건강함을 입증해 보이려는 심리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문득 내 콤플렉스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무언가 이루려고 안절부절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이 먹는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반발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허영심일까? 은퇴 이후에 한방의술로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선교사역에서도 쓸모 있는 앙코르인생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과연 진짜 나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나일까? 내게 걸려오는 심야의 전화는 무엇이라고 말해줄까?
책장을 덮을 즈음에 엔도 슈사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두 개의 자기는 모두 자기 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나, 겉모습과 속모습의 나, 고매함이나 허영심까지도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참 나를 찾는 길은 두개의 나를 부정하지 말고 전화(轉化)시키는 길이다.”
어제 저녁, 한방 본초시간에 명망이 높은 S교수는 누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음속에 감동이 일었다. “누에는 5번 잠을 잡니다. 그런데 누에는 잠을 자면서 나는 이대로 벌레로 남을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지요. 벌레는 땅을 기면서 흘린 것만 주어먹고 삽니다. 뜻이 있는 누에는 날고 싶다는 꿈을 키우지요. 곧 누에는 입에서 자신의 일부를 씹어 고치를 짓습니다. 그 속에서 번데기로 묵묵히 내공을 쌓고 비상의 꿈을 키우지요. 이렇게 날개를 단 누에는 나비로 다시 태어나 꽃들 사이에서 생명의 메신저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전화(轉化)일 것이다. 번데기를 거쳐야만 완전한 전화를 이룬다는 섭리를 되새겨본다. 내 콤플렉스의 본질은 빨리 빨리 서둘러서 번데기를 거치지 않고 날개를 달아보겠다고 하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며 조급함과 허영심과 피곤이 여유와 기쁨, 그리고 내공으로 전화될 수 있게 도와주십사 하고 기도한다.
김희봉/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