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춘
시애틀 고문
불경기가 몇 년째 요지부동이지만 연말파티는 올해도 어김없이 줄을 잇는다. 신문에 송년모임 기사와 광고가 매일 실린다. 한 주말에 서너 군데 송년모임에 뛰어다니는 마당발 인사도 있다.
언제부턴지 송년모임에 웃기는 건배 구호가 등장했다.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미래를 위하여)”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따위인데, 뭐니뭐니 해도 “구구 팔팔 이삼사(99-88-2-3-4)”가 압권이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앓은 후 4일째 사망하자”는 뜻이다.
요즘은 2~3일 앓는 것도 싫은지 “구구 팔팔 복상사”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산 뒤 앓기는커녕 즐거움 가운데(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복상사’하자는 뜻이란다. 물론 술자리 우스개지만 ‘이삼사’나 ‘복상사’는 몰라도 앞으로 99세까지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 통계청은 지난해 태어난 아기의 예상수명이 80.8세(여자 84.1세, 남자 77.2세)라고 발표했다. 그 아기의 아기는 아마도 99세까지 살 수 있을 듯하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생명표’를 기준으로하면 지금 30세인 여자는 앞으로 55년(남자는 48년) 더 살 수 있다. 현재 45세인 여자는 40년(남자는 34년) 더 살 수 있고, 65세 여자는 22년(남자는 17년) 더 살아 ‘미수’(80세)를 너끈히 넘길 수 있다.
인간수명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미국인구 중 90세 이상이 190여만명이다. 30년 새 3배나 증가했다. 이들 ‘수퍼노인’은 2050년께 870만명으로 늘어나 전체인구의 2%를 점유하게 된다. 한 세기 전까지만해도 90세까지 산 미국인은 10만명 미만이었다. 한국의 경우 현재 65세 이상 노인은 인구 10명중 1명꼴(11%)이지만 반세기 후인 2060년엔 10명중 4명꼴(40.1%)로 늘어난다. 반면에 경제활동 인구는 2060년까지 무려 1,400만명이나 줄어들어 근로자 10명이 노인 8명과 어린이 2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미국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35년 소셜시큐리티(사회보장제도)가 시작됐을 때 62세였던 미국인들의 평균예상수명이 지금은 78세로 16년이나 늘었다. 현재는 근로자 5명이 노인 한명을 부양하지만 20년 후엔 근로자 3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하게 된다.
다행히 요즘 65세 이상 노인은 반세기 전의 장년 못지않게 팔팔하다. 공화당의 내년 대선주자들 중 미트 롬니가 64세, 뉴트 깅리치가 68세, 론 폴이 76세이다. 지난번 대선에서 25세 연하인 오바마에 패하긴 했지만 존 매케인 당시 공화당 후보도 72세였다.
하지만, 팔팔한 또래 노인들이 늘어나도 나에겐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지는 데 따른 일종의 ‘연말 신드롬’ 탓이다. 고작 15년 남짓한 ‘생명표’의 잔여수명이 또 1년 줄어든다. 그러려니 해서 그런지 희어진 머리카락도 부쩍 많이 빠진다.
한 살을 더 먹지 않고 한 살을 더 잃는 셈이다. 괴테도 ‘노인의 삶은 상실의 삶’이라고 했다. 의욕도, 체력도, 등산의 고도도 점점 더 떨어진다. 늘어나는 건 남들이 불러주는 ‘할아버지’ 칭호뿐이다. 연말에 내년을 계획하기보다 작년 일을 더 많이 회상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수(壽)·부(富)·강령(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5복으로 꼽았다. 장수하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덕을 쌓고, 편안히 죽는 것을 뜻한다. 요즘 한국의 노인들은 건강·돈·일·친구·꿈을 5복으로 꼽는다. 건강이 남아 있고, 쓸 돈이 있으며, 죽을 때까지 삶을 지탱해주는 일거리가 있고, 노년의 고독과 소외감을 함께 해소할 친구가 있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이란다.
어느 쪽이든 ‘구구 팔팔 이삼사’와 일맥상통한다. 올해 연말파티에선 ‘구구 팔팔 이삼사’ 건배 구호를 힘껏 외쳐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