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놀부와 졸부

2011-12-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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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네 집에 스님이 시주를 얻으러 왔다. 놀부는 스님이 곧 가려니 하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스님이 끈기 있게 기다리며 불경을 외웠다. “가나바라, 가나바(봐)라…” 놀부도 마주 서서 불경을 외웠다. “주나바라, 주나바(봐)라…”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유머다.

놀부는 어려서부터 심술쟁이였다. 넝쿨호박에 말뚝 박기, 남의 논에서 물 빼기, 초상집 찾아가 노래 부르기 등 못된 짓을 일삼았다. 부모가 죽자 유산을 독차지하고는 한 집에서 살아온 동생 흥부가족을 쫓아냈다. 그가 스님에게 시주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영국에도 놀부 얘기가 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다. 주인공인 에벤에셀 스크루지는 심술쟁이라기보다는 자린고비다. 쥐꼬리 월급을 주며 점원으로 부리는 조카가 엄동설한에 석탄 한 덩어리를 상점 난로에 넣으려하자 “춥긴 뭐가 춥냐”며 호통 쳤다.


놀부와 스크루지가 떠난지 수백년이 지났지만 욕심쟁이 부자들은 한국에도, 미국에도 여전히 많다. 놀부처럼 유산을 받은 부자도, 스크루지처럼 자수성가한 부자도 있지만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또는 금융제도의 부조리를 악용해 떼돈을 번 졸부들도 매우 많다.

요즘 이들 졸부를 규탄하는 ‘월가(Wall Street) 점령’ 시위가 전국에서 석달 째 이어지고 있다. 놀부가 박에서 쏟아진 도깨비들에게,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현몽한 세 동료의 귀신들에게 혼난 것처럼, 인구의 1%인 부자들이 99%인 서민들에게 혼나고 있다.

놀부와 스크루지와 졸부의 공통적인 속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들여 호화롭게 살지만 자기가 고용한 근로자나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복리복지에는 냉담하다는 점이다. 시위를 벌이는 자칭 ‘99% 국민’의 요구도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물론 졸부 아닌 부자들도 있다 세계제일의 갑부인 빌 게이츠(그도 한 때 욕을 먹었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재단을 세워 미국과 지구촌의 의료, 교육, 복지 향상에 크게 한 몫 하고 있다. 록펠러재단이나 카네기재단 같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선재단도 많다.

그렇지만 자선은 부자 재단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들은 영세민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졸부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으로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다. 자고로 어려운 이웃은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비슷한 처지의 이웃이 도와왔다.

미국인들은 매년 ‘땡스기빙’(감사절))이 낀 연말연시에 남에게 감사거리를 주는 자선활동을 펼친다. 아예 11월19일을 ‘자선의 날’로 정해 놨다. 국민 10명 중 7명꼴로 돈을 기부하거나 노력봉사 한다. 미국인들의 한 해 기부금 총액이 대략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쌀광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100% 맞는 건 아니다. 자선행위는 경기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주머니가 가벼워졌을 때 불우이웃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기부금이 더 많이 들어온다.

한인사회에 놀부나 졸부보다 스크루지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으로 개과천선한 뒤 커뮤니티 자선활동에 앞장 서는 ‘큰손 기부자’로 재탄생해 이름값을 했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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