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족 시인들의 숨결

2011-1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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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도성
텍사스 문협 부회장

민족시인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이육사를 기리는 문학행사가 남가주 이성호 시인의 산장에서 12일 열린다.

이들은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이 민족 시인들의 시를 우리는 지금 예사로이 읽고 있지만 그들의 시구 한마디 한마디는 피로 쓴 생명 그 자체이다.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짧은 시구 하나를 썼다는 것은 당시로서 자기의 생명을 내던지는 것과도 같은 행위였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본다. 이 시인들이 산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늘에는 B-29 비행기 소리가 그치지 않고, 긴 칼 찬 일본 헌병들이 뒤를 쫓는 무시무시한 때였다. 그 속에서 이들은 나라 사랑의 애끓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번 문학행사에는 이육사 시인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따님이 멀리 경상북도 안동에서 참여한다. 100년 전의 역사를 오늘에 재현시키는 의미가 있다.
이육사의 따님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되는지 전화로 물어보았다. 당시 네 살밖에 안되었던 그가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청량리역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용수(죄수의 얼굴에 씌우는 것)로 얼굴을 가리고 포승줄에 묶인 죄수의 모습이었다며 떨리던 전화 목소리가 지금도 나의 고막을 울린다.

이육사의 딸의 이름은 옥비(沃非)라고 한다. 물댈 ‘옥’, 아닐 ‘비’이다. 물꼬가 있는 문전옥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육사가 왜 좋고 밝은 이름을 딸에게 지어주지 아니하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딸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문전옥답과 같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하는 시대의 뜻을 하나밖에 없는 딸의 이름에 붙여준 것이 아닐까.

이육사는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4년 후에 이역 땅 베이징 감옥에서 정월달 추위에 떤 모습으로 죽었다.

이육사는 이퇴계의 14대 손이고 어머니는 허 씨이다. 길지 않은 생애에서 17번이나 감옥소를 들락날락한 그의 민족의식은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외숙 한분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20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이육사의 외가에는 나라 위해 몸 바친 분들에게 주는 건국공로훈장이 6개나 서훈되었다.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는 이성호 시인은 해마다 윤동주 시인 추모 문학행사를 그의 산장에서 개최해 왔다. 외부의 도움 없이 자비로 큰 행사를 개최하는 이 시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남가주의 많은 한인들이 일상에서 잠시 손을 놓고 고요한 산장에서 가서 100년 전 민족 시인들의 체취를 느껴 보았으면 한다.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을 함께 나눈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디다 무릅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을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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