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이책과 전자책

2011-10-06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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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만식 기독교윤리실천 운동본부 이사

산책길에 보더스 책방에 들렀었다. “폐점 잔고 세일”이라고 크게 써 붙인 광고가 시선을 끌어 궁금증도 풀 겸 들어가 보니 마치 찾고 있던 책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몇 권을 챙겨들고 소설류 서가 앞에 멈춰 섰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이 눈에 띄니 반가웠다. 엊그제 그녀가 워싱턴에 들러 북투어 모임을 가졌었기에 반가움은 더욱 새롭다. 산뜻하게 디자인된 장정하며 세련된 색채감과 모양새가 가히 국제판으로 손색이 없었다.
보더스는 한때 1,249개나 되는 판매망을 가졌던 맘모스 서점이었다. 그런 서점이 지금 파산의 쓰라림을 안고 이별을 고하고 있는 중이다.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책 더미 속에 홀로 끼어있는 한 권의 한국소설, 그도 역시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서둘러 퇴장하고 있는 저들 책들의 대열 속엔 어쩌면 책 문화라는 운명의 길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 일요판에 “사우스 코리아, 종이 없는 학교수업에 선두를 서다”라는 기사가 나와 2015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교과서는 사라지고 디지털 태블릿 하나만 갖고 등교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불과 4년, 그 사이에 일어날 책문화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IT 왕국 한국이 선봉에 선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나일강변에 자생하던 파피루스풀로 시작해 4천년이란 기나 긴 세월을 인류와 함께 한 종이문화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수증기라면 그 수증기가 손바닥 크기의 아이패드(iPad)란 상자 속으로 돌아와 사이버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평이다. 일찍이 미국 초등학교에서 필기체 글씨가 교과목에서 사라졌는가 했더니 2012년 새 학기부터는 아예 습자과목(Penmanship)을 필수에서 선택 과목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글자는 눈으로 보고 식별만 하면 만족하다는 뜻이리라. 잉크병에 펜을 찍어 흐르듯 나는 듯 백지위로 유연하게 뻗어나가던 육필의 율동은 이제 추억의 언덕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다.
미래의 2020년 9월 K 씨는 교회에 출석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팔목에 찬 마이크로 센서가 “꼬레 구굴” 아이팟을 잊고 왔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구를 거듭한 이 꼬레 구굴은 한국이 개발한 특수 건전지가 장착된 재충전이 필요 없는 만능 아이팟이다. 돌출된 키보드로 K의 손가락은 감각만으로도 손쉽게 성경구절이며 찬송곡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날 아침도 이 스마트팩은 교회 시간에 맞춰 K의 잠을 깨워주었고 키보드를 누르니 혈압, 혈당지수, 콜레스테롤 상태는 물론 그날의 날씨와 행사 일정을 알려주었다. 이제 이 작은 요정 판도라 상자는 별수 없이 그의 의식주를 총괄하는 생활필수품이며 그의 몸의 한 지체이다.
‘반스 앤 노블’ 서점마저 문을 닫고 도서관 건물들은 다른 목적으로 용도 변경된 지 오래다. 모든 책자는 아마존 닷 컴으로 주문을 할 수는 있으나 K는 차라리 디지털 맥스 도서창고에서 다운로드를 받는 것이 지름길이요 경제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문맹보다 더 무서운 것은 컴맹이다. 다윗은 “의인은 늙어도 여전이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 하고 빛이 청청 하니라”라고 읊으면서 연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있다. 우리 모두 IT 선진국 한국의 긍지를 지켜 나갈 때이다. 지금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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