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헌 신발도 짝이 있다

2011-09-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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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자 간디가 막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타다가 구두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가 달리자 간디는 얼른 다른 한 짝의 구두를 벗어 플랫폼에 던졌다. 동행자들이 의아해하자 간디는 “내게 남은 신발 한 짝은 어차피 쓸모가 없다. 헌 신발이지만 짝을 맞춰줘야 가난한 사람이 주워서 신을 게 아니냐”고 대답했다.

“헌 신발도 짝이 있다”는 우리네 속담을 간디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개 나이 많은 남녀가 결혼할 때 비유되는 이 속담의 뿌리는 놀랍게도 반만년(믿거나 말거나)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4344년 전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헌 신발도 짝이 있노니 부부는 나이 들어서도 사랑하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쳤다고 민족학자들은 말한다.

모든 신발은 원래 짝(켤레)으로 만들어지지만 사람들은 자기 짝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미국인들의 평균 결혼연령이 남자 28세, 여자 26세로 20년 전보다 2년 늦춰졌다고 작년에 실시된 센서스 보고서가 밝혔다. 헌 신발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한인 젊은이들은 이민사회의 특성상 동족 짝을 찾아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한인 1세 중 거의 80%가 사위나 며느리 감으로 동족인 한인을 꼽는다는 사실이 4년 전 본보의 서북미 한인 의식구조 조사에서 밝혀졌다. 동족이 어렵다면 중국인, 일본인 등 같은 동양계를 선호한다는 사람도 20%를 웃돌았다. 그러나 당사자인 자녀들(미혼 응답자)의 경우 4명 중 1명은 “인종과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다”고 답했다.

최근 한 결혼 피로연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결혼식에 수없이 참석했고 주례도 몇 번 서봤지만 그날 분위기는 전혀 색달랐다. 주인공은 한인신랑과 백인신부였다. 하버드 출신인 신랑은 워싱턴대학 한국학 살리기 운동에 앞장섰던 이익환 씨와 본보 불우이웃돕기 이사인 박귀희 박사의 아들이다. 신부 역시 명문대학을 나온 양가 규수였다.

이미 타 도시에서 혼례식을 마친 신랑신부의 이날 피로연은 ‘폐백’이 주제였
다. 전통한식 혼례복 차림의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에게 어설프게 큰절을 올렸다. 시부모가 던져주는 대추를 치마폭을 벌려 열심히 받는 파란 눈의 신부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신랑이 신부를 업고 장내를 돌자 대부분 다문화 가족인 하객들이 박수로 축복해줬다.

특히, 이날 폐백도중 시애틀에선 좀체 듣기 어려운 전통 국악연주가 곁들여졌다. 워싱턴대학에 방문교수로 와 있는 이영섭 명인이 대금과 태평소를 신들린 듯 연주해 신랑신부와 하객들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문화배경이 전혀 다른 새 며느리와 그 친정가족에게 한국의 전통 혼례문화와 고전음악을 알려주려는 신랑 부모의 배려였다.

잔칫날이 6·25 기념일이었고 장소가 보잉필드의 항공 박물관이었던 것도 감동을 더해 줬다. 동족상잔의 참상을 떠올리게 하는 폭격기들이 전시된 곳에서 60년전의 ‘국제결혼’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다문화 결혼’을 볼 수 있었고, 그 결혼을 지금은 주류사회 속에 한인파워로 자리 잡은 선배 다문화가족이 축복해주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물론 이날의 신랑신부는 결코 ‘헌 신발’이 아니다. 새 신발일 뿐더러 무늬와 색깔과 기능이 튀는 최첨단 신발이다. 제한된 이민 동족사회를 뛰어넘어 광대무변의 주류사회에서 찾은 짝이다. 선택의 폭이 넓은 만큼 질도 우수할 수 있다. 한국의 뿌리를 거둬 미국에 이민 온 부모들의 진취적 기상을 한걸음 더 발전시킨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한인사회엔 아직 짝을 찾지 못하고 나이만 늘어나는 총각처녀들이 많다. 이들에게도 반만년 간 진리로 통해온 “헌 신발도 짝이 있다”는 속담이 하루 속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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