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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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와 교육의 우선순위

2011-06-2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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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칼럼

내가 처음 교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지체장애 아동들을 위한 특수학교였다.

다른 어떤 장애보다도 정상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고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부모들의 생각은 늘 질병으로 인해 생긴 마비와 근육 이상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를 반영하듯 내가 재직하던 곳도 가장 웅장하게 버티고 서서 들어오는 방문객을 맞이하던 건물이 병원이었다.

모든 재학생들은 먼저 병원에 입원을 하여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고 치료기간에 수업을 받으러 옆 건물에 있는 특수학교를 다녔다.


그때 늘 듣던 말이 ‘선 치료, 후 교육’이란 슬로건이었고 그 말은 곧 학교운영의 최고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정책으로 학생들은 병원치료와 재활치료 스케줄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학습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실로 향했다.

부모들은 한 오라기 희망의 말에도 자녀를 수술대에 누이곤 했고 공부보다도 재활치료를 강요했다. 부모 이상으로 자신의 장애를 치유해 보려는 아이들의 절실함을 대할 때 부모의 욕심이라고만 빈정대기엔 마음이 아팠다.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내가 똑같이 겪었던 어렸을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그 마음과 기억을 어루만져 본다.

장애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어릴 때는 무조건 아픈 치료가 싫었다.

마비된 다리를 고쳐주겠다며 온갖 치료법을 들고 와 침을 찌르고, 피를 뽑고, 다리를 잡아당기고, 쓰디쓴 약들을 입에 털어 넣을 땐 정말 도망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니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 치료가 가져다주는 고통쯤은 참겠다던 새로운 각오가 생겼었다.

그러나 내로라하게 장담하던 치료의 효과는 늘 없었고 그들의 실패의 책임은 내 자신의 아픔으로 고스란히 남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실패의 경험을 거듭하며 맹목적인 기대로 눈먼 부모보다 내가 먼저 치료에 불살랐던 의지를 접었었다. 매일 침을 맞으러 가는데 낭비했던 시간을 활용해 타이프를 배웠고 기타와 붓글씨와 꽃꽂이 등 내가 좋아하는 일로 메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장애는 부모의 일이 아니고 내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하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장애가 한 눈에 보이고 원인이 바이러스균에 의한 것이라 의학적 도움이 우선되어야 하는 경우에도 완치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장애는 더 이상 ‘질병’ 그 자체가 아니고 질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의 경우는 질병과 후유증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도 쉽지 않고 더욱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폐나 행동장애, 지적장애의 경우에는 약을 먹이거나 치료를 하거나 공부를 더욱 열심히 가르치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낫기를 갈망하고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굳이 이해를 시켜려 하지 않아도 될까? 문제는 이해를 하고 받아들일 때 올바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질병으로 생각하고 낫는 것이 목적일 때는 여러 치료방법을 찾아다니는 방법을 지속할 것이고 장애로 인정을 하면 앞으로 어떻게 보안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교육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장애에 있어서 치료는 ‘유지’의 의미를 갖는다. 더 나빠지지 않고 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료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점에 이르고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잠재력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현 수준보다 기능을 높일 수 있는 것은 교육이다. 장애로 인해 일반아동보다 경험의 폭이 좁아지지 않도록 조기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잠재력을 키워줄 수 있는 개별화된 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장애를 극복하게 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김효선<칼스테이트 LA특수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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