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클레오파트라가 살고 있었다

2011-03-18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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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애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어린 시절, 그곳에 클레오파트라가 살고 있었다.
우리 집은 딸이 쪼르륵 여섯이다. 딸이 풍년이라 귀한 줄 몰라서였는지 아버지는 절대로 우릴 미장원이나 이발소에 데리고 가는 법이 없었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미장원이나 이발소가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미용사나 이발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약 두어 달에 한 번쯤, 보따리장수 미용사와 이발사가 동네를 찾아왔었다. 만약에 딸들을 예쁘게 키우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더라면, 우리도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린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미용사나 이발사가 찾아와 온 동네가 삭발하는 날이면, 우리도 웃통을 벗고 양지바른 닭장 앞에 일렬로 쪼르르 앉았다. 머리 깎는 날이면 우린 놀러 못 나가고 우리 안에 갇힌 닭들 신세가 되었다. 차례가 아직 멀었는데도 웃통을 벗고 닭장 앞에 앉아있어야 했던 이유는, 행여 싸돌아다니다가 머리 깎는 걸 잊어버릴까봐 서였다.
한 놈이 사라지고 없으면 또 다른 놈이 찾아나서고, 그 놈마저 돌아오지 않으면 머리를 깎다 말고 아버지가 찾아나서야 했으므로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바리캉 기계의 둔탁한 날이 머리카락을 뜯어먹는 바람에 머릿속이 욱신거리기도 했지만, 그까짓 것은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마치 같은 모양의 커터기로 꾹꾹 눌러 찍어 놓은 것 같은 헤어스타일이었다. 고만고만한 나이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알쏭달쏭하기는 손님이나 가족이나 매 마찬가지였다.
특히 뒷모습을 보고 식별한다는 건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했다. 체형도 비슷하고 걷는 폼도 유사했을 테니까. 어쩌다가 옷을 바꿔 입고 있을 때면 얼굴을 보고도 엄마는 엉뚱한 이름을 불러댔다. 내 이름이 아니라서 멀뚱히 서 있다가 대답하지 않는다고 날벼락을 맞기도 했다.
그런저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난 차별화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공주 머리를 원했다. 약간 곱슬한 긴 머리를 틀어 올리는 상상도 했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긴 머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곱슬머리를 갖고 싶어 쇠 부지깽이를 달궈 말다가 그나마 짧은 앞머리가 뭉텅 타 버려 더욱 짧아져 버린 사건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피해 볼까 하고 잔머리를 팽그르르 굴려 보았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오직 클레오파트라 머리밖에 깎을 줄 몰랐다.
클레오파트라와 나. 그녀와 나의 헤어스타일에는 길이에 있어서 조금, 아주 조금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는 자매처럼 닮았었다. 우선 머리색이 까맣고 헤어스타일이 사각이었다. 앞머리는 눈썹 조금 위에서 일자로 정확하게 잘려 양쪽 귀 직전에서 멈췄다.
양쪽 귀 시작점에서 밑으로 귓불까지 직각으로 내려온 찰랑찰랑한 머리. 뒷머리는 산허리를 돌아가는 도로처럼 뒤통수를 따라 잘랐다. 빨랫비누로 만든 거품을 목 뒷덜미에 척척 바르고 나서, 식칼에 버금가는 큰 면도날로 쓱쓱 밀어냈다.
머리를 자른 후 한 가지 의식이 꼭 기다리고 있었다. 이발사 면허증 없이도 이토록 수려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었는지, 손바닥만 한 거울을 내 왼손에 쥐어 주고 아버지는 큼지막한 거울을 내 뒤통수에 대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뒷거울에 비친 뒤통수를 바라보기보다는 앞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눈은 찌그러지고 입은 퉁퉁 불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빛~나는 졸~업장~”이라는 노래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머리를 뽀글뽀글 볶아 버렸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머리밖에 자를 줄 모르는 아버지 곁을 훨훨 떠나 자식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앨범 속에서 어린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내가 바리캉 기계로 손수 깎아준 두 딸의 모습이었다!
아! 내 속에 클레오파트라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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