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외우는 교육을 시켰던 어린 시절엔 노래에 맞춰 외우면 외우기가 쉬웠다.
24절기를 외웠는데 아직도 기억 속에 있다.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하는 노래인데 동요에 대입한 것이라 지금까지도 시도 때도 없이 입가에 맴돈다. 그 노래의 첫 소절이 봄의 절기들이다.
달력 한 장이 순식간에 뜯겨져 나가더니, 짧아서 더 아쉬운 새끼손가락 같은 2월도 휙 스쳐가고, 우수도 지난 경칩을 앞둔 3월이 되었다. 정말 이 속도로 가면 일 년이 일사천리로 지날 듯싶다.
‘봄’은 본다의 명사형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살금 보이는 계절이 봄이 아닐까? 죽은 것 같았던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파릇한 새싹이 돋고 얼음장 같던 강물 밑으로 새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계절. 봄은 사람들을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게 한다. 봄엔 무언가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에 설렌다. 희망이 있으되 요란하지 않은 계절이다.마당을 돌보지도 않고 별로 관심도 없는 내가 지난 토요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았다. 나목들 사이에 한 나무만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형광등 켠 듯 눈 부셨다. 가지치기를 하던 남편에게 물으니 자두꽃이라 한다. 자세히 보니 다섯장 흰 꽃잎에 연둣빛 꽃받침 노란 꽃술이 앙증맞은 배꽃 같다. 추위에 흔들리는 얇은 꽃잎이 더 애잔해 보인다. 오얏(李)꽃이라니 우리 가족의 성씨와 같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집 뒷마당을 밝히고 있었구나. 내 맘대로 추측했다. 올 겨울은 잦은 비와 변덕스런 날씨로 사람들도 추위에 고생했다. 그런 중에 만개한 꽃을 보니 대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시인이 계시다. 이곳에 오셔서 ‘결핍의 축복’을
이야기하시면서 봄에 핀 꽃이 새롭더라고 하셨다. 꽃이 피려면 겨울이 필요하고 얼마간의 추위도 필요로 한다. 그런 아쉬운 점이 있을 때 그 보상으로 꽃은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봄에 피어나는 꽃들은 결핍과 생명의 위기에 대한 선물이지 싶다.
이런 등식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사람도 풍요와 안락 속에서는 향기로운 인생을 열지 못하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적절한 충격과 시련 뒤에 축복으로 오는 것이 빛나는 인생이라고 하셨다. 고통을 체험한 어르신의 말씀이어서 구구절절이 와 닿았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식물에게든 인간에게든 결핍과 시련은 하나의 축복으로 바뀌게 모순의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3월은 한결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이라 했다. 봄바람에 처녀 가슴이 흔들린다는 우리의 정서나 북미주 인디언인 체로키 족의 ‘마음을 움직이는 달’이 통하는 듯하여 재미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고 봄처녀 제 오시는 봄이다. 얼었던 거리가 녹는 봄에 멀어진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지는 봄이면 좋겠다. 봄보로 봄봄 보옴봄’ 봄이 왔다.
이 정 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