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중국의 부동산 개발 붐 타고 설계 의뢰 쇄도

2011-01-20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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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덕분에 입 벌어진 미국의 건축가들

시애틀의 건축가인 스튜어트 실크는 건축설계 일을 해온 지 사반세기가 되었지만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설계 의뢰를 받았다. 고객을 만날 필요도 없고, 건축 양식이나 예산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초호화 주택 세 채를 설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는 전체 건평, 침실과 욕실 수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뿐이었다.

“예산도, 건축양식도 구애받지 말라” 주문에
건축가들 돈도 벌고 예술성도 한껏 살리고

이런 의뢰를 받은 실크는 “여러 감정이 머릿속을 지나가더라”고 했다.


“그 중 하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다음에는 아무런 방향도 제시받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책임감이 불안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대단히 자유롭고 지적으로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설계 의뢰는 중국, 상하이에서 온 것이었다. 상하이의 부동산 개발업자가 주택 가격 750만 달러에서 1,500만 달러 상당의 초호화 빌라 커뮤니티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실크에게 설계 의뢰가 들어온 것은 개발업자의 컨설턴트가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 있는 그가 설계한 집을 보고 마음에 든 때문이었다. 처음 세 채에 대한 설계 의뢰를 받았지만 곧 9채로 늘었다.

미국의 건축가들이 중국 덕분에 요즘 잘 나가고 있다. 직원 17명인 실크의 건축 사무소와 같이 미 전국의 중소 규모 건축회사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프로젝트로 상당한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 수백만 달러 호화 저택에서부터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까지 건축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스키드모어, 오윙스 & 메릴, HOK 등 거대 건축기업들은 수십년 전부터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해왔지만 중소 건축회사들에 중국 프로젝트들이 밀려든 것은 불과 수년 전부터의 일이다.

건축가들이 중국의 설계 의뢰에 감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경제침체로 미국 일거리가 말라버린 상황에서 중국이 그 자리를 메워주니 고마운 건 자명하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개발업자들과 정부 기관들은 일을 맡기는 고객으로서 미국인들 보다 낫다는 것이 미국 건축가들의 생각이다. 중국인들은 과감하고, 모험적이며, 건축에 필요한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축가들로서는 종종 억압당해온 예술적 기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 전율을 느낀다.

실크가 설계를 맡은 종카이 쉬산 빌라 프로젝트가 일례. 상하이 교외지역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이 빌라 프로젝트는 중국 개발업자들이 어떤 식으로 설계 의뢰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이 개발 프로젝트는 45 에이커의 땅에 80채의 주문식 빌라를 건축하는 것이다. 상하이의 ZK 부동산 개발업체가 주도한 프로젝트로 이를 위해 컨설턴트인 왕 키안은 지난 2003년 팜 스프링스, LA, 토론토의 호화 커뮤니티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북미지역에서 17명의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맡겼고 그중 10명을 추려냈다. 실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실크는 9채의 빌라에 대해 제각기 다른 9개의 설계를 요구 받았다. 그런데 어떤 스타일로 해야 한다는 지침이 전혀 없었다. 건축가로서 일해 온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고객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건축가가 아니라 백지 캔버스를 마주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빌라들이 들어설 상하이 교외를 방문하고 그곳의 경치를 표현한 시적 언어들을 대한 후 그가 설계한 주택 중의 하나가 ‘휘어진 길들’이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려지는 원들처럼 둥글게 휘어지는 벽들이 길을 만들고 공간을 구획 짓는다”는 구상이다.

빌라 5채에 대한 설계 의뢰는 애틀랜타의 맥 스코진 메릴 엘람 건축회사에게 돌아갔다. 이 회사 대표 역시 고객이 미리 생각해둔 구상 없이 설계를 해보기는 처음이었고, 자신의 미적 취향을 내세우지 않는 고객을 위해 일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의 건축가들은 중국 개발업자들의 열린 시각에 고무되어 있다. 대단히 파격적인 설계들도 그들은 과감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건축가가 어떤 설계를 하고 어떤 자재를 사용하든지 그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85명의 직원을 거느린 시카고의 건축회사, 괴트치 파트너스는 이제 전체 일의 절반은 중국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처럼 건축 예산을 정하지 않는다”고 이 회사의 제임스 괴트치 회장은 말한다. 예산 문제 때문에 프로젝트 진행이 지연되거나 중단된 적이 없다고 한다.

중국의 프로젝트들을 맡으면서 건축가들이 깨닫는 것은 관계의 중요성이다. 인내심을 갖고 공 들인 관계가 중국에서는 장기적 마케팅의 핵심이다. 한번 프로젝트를 맡으면 수시로 중국을 방문하면서 관계를 긴밀히 하고, 그 관계를 통해 계속 프로젝트가 맡겨지는 것이다.

괴트치 파트너스는 그래서 중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태생의 젊은이를 파트너로 영입했다. 아시아 담당 국장인 제임스 젱이다. 제임스는 근무 시간의 60%를 중국에서 쓰는데 그 대부분은 인맥 관리에 할애된다.

덕분에 괴트치는 중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중간높이 빌딩과 고층 빌딩 프로젝트 25개를 맡아했고, 지금은 텐진 시를 위해 1,440 피트짜리 타워를 설계 중이다. 프로젝트가 밀려들다 보니 이제는 아무 프로젝트나 맡지 않고 까다롭게 선정하는 수준이 되었다고 젱은 말한다.

<뉴욕 타임스 - 본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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