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천사의 도시, 동맥을 그리다

2025-12-12 (금) 12:00:00 하은선 기자
크게 작게

▶ 유영훈 개인전 ‘유니언 스테이션’

▶ 20일까지 LA 839 갤러리

천사의 도시, 동맥을 그리다

유영훈씨 작품 ‘8(2)’(2024)(왼쪽), 유영훈씨 작품 ‘Fin de Siecle Moon Walk’(2024)

LA에서 활동하는 유영훈 작가의 첫 개인전 ‘유니언 스테이션’이 개막했다. 오는 20일까지 839갤러리(839 N. Cherokee Ave., LA)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도시 인프라를 관통하는 움직임과 신체, 그리고 그 사이의 틈새를 탐구하는 작가의 신작 및 최근 회화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작품은 ‘8(2)’(2024)는 점과 선으로 추상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기차의 경로를 따라간다. 철도 노선도의 정밀함과 움직임의 운동 에너지가 화면에 녹아들고, 은은한 톤의 물감 번짐은 역에서 기다리는 감각적 경험을 암시한다. 화면의 깜빡임, 발밑의 울림, 졸음 속으로 빠져드는 생각의 흐름까지 표현한다. 작품명은 LA 유니언 스테이션의 8번 선로에서 유래했다.

미국 서부 최대 여객역이자 LA의 주요 철도 허브인 이곳에서 작가는 학생 시절 다운타운에서 클레어몬트까지 통근하며 일상의 리듬을 경험했다. 시간표에 의해 통제되지만 우연과 방해,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로 채워지는 통근의 공간. 유는 이를 예측 불가능성이 공존하는 장소로 재해석한다. 동아시아 수비학에서 행운과 번영을 상징하는 숫자 8은 작가의 우연과 행운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유영훈 작가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LA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UCLA에서 영문학 학사를 취득했으며 클레어몬트 대학원을 마쳤다. 그의 석사 학위 논문 전시 ‘헤테로토피아 아메리카나’(Heterotopia Americana)는 균형, 이탈, 정체성·공간·지각의 불안정한 경계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다문화적·이주적 시각을 바탕으로 유목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작가는 2022년 LA시티칼리지에서 케리 제임스 마셜 상을 수상했다.

‘유니언 스테이션’을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역과 열차, 정지와 운동, 사회적 교류와 고독 사이의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 유는 터널과 선로를 동맥과 혈관에 비유하며 교통을 도시의 순환계로 규정한다. 기차는 미셸 푸코가 제시한 ‘이질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공유된 통과의 공간이자 동시에 고립과 성찰의 ‘다른’ 장소인 것이다.

미국인의 상상 속에서 기차는 오랜 세월 자유와 확장, 출발의 낭만을 상징해왔다. 개척 신화와 명백한 운명론부터 비트 세대의 불안한 방랑 정신에 이르기까지. 유는 이 공간 안에서 승객들의 흐름에 주목하며, 각 움직임이 남기는 흔적을 포착한다.

기차의 상징성은 특히 LA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한때 정교한 철도망을 갖추었던 이 지역은 이제 그 기능성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서부 전역의 철도는 위험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린 중국인 노동자들의 땀으로 건설되었다. 배제법은 그들의 작업이 끝난 후 그들의 존재를 지우려 했으며, 이는 인프라 확장의 기반이 된 불평등을 상기시킨다. 이 철로들은 차례로 이주의 동맥이 되어 지역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공동체들을 연결했다.

유영훈 작가의 회화는 이러한 인프라를 성찰과 기억, 형식적 서정성의 장소로 다루면서도 그 추악한 층위를 인정한다. 친숙하면서도 낯설고, 현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그의 화면은 살아온 경험의 모순을 반영한다. 일상의 통근 경로에서 발견한 시적 순간부터 인프라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까지, 유영훈의 ‘유니언 스테이션’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공간에 담긴 복잡한 서사를 드러낸다.

839 갤러리 주소 839 N. Cherokee Ave., LA 이메일 info@839gallery.com 예약 필수

<하은선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