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이 열렸던 2009년 3월 24일. 32가 한인타운과 플러싱, 뉴저지 일대의 식당과 주점들은 한인들의 응원열기로 뜨거웠다. 그때 비록 어른들처럼 ‘한 잔’ 하면서 경기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시청하고 막판에 분통을 터트리며 안타까워하던 7살 소년이 있었다. 롱아일랜드의 IS 266 4학년인 김광염군(미국명 딜런)이다. “미국팀도 응원하긴 했지만 정말 한국팀이 우승하길 바랬어요. 특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추신수, 이대호 선수가 안타를 날리는 것을 보면서 너무 신났어요.”
광염군은 현재 커뮤니티 야구팀인 HBQQ팀 유년부에서 3번 타자 겸 유격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클린업트리오에 가장 어려운 수비 위치를 맡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남다른 운동 감각을 가졌으며 농구와 풋볼에도 능하다. 이 팀의 유일한 한인학생인 광염군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난해 올스타에 선정되어 타 지역 올스타팀과의 경기에 참가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광염군은 건강을 위해 혹은 취미로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광염군의 꿈은 난생 처음 메츠 구장을 찾았던 4살 때부터 이미 메이저리거였다. 아버지 토니 김씨는 열렬한 스포츠광으로 메츠의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늘 두 아들을 데리고 셰이스타디움에 갔다.
광염군에게 세상에서 가장 신났던 일은 셰이스타디움 주차장에서 바비큐 그릴을 차려놓고 아버지와 핫도그를 구워먹으며 경기를 기다리던 것이다. 신동으로 불렸던 음악가들 중에는 3~4살 때 처음 연주회장에 가서 “아, 내가 평생 해야 할 것은 음악이구나”라고 바로 ‘꽂히는’ 경우가 많았다. 광염군에게 메츠의 첫 경기 관람은 바로 그런 경험에 비유할 만하다. 박찬호 이후 많은 한국 선수들의 꿈의 무대를 밟았지만 아직까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선수가 메이저리거가 된 적은 없다. 어쩌면 광염군이 첫 번째가 될 수도 있다. 한 번은 부모가 “너, 메이저리그 갈래 아님 하버드대학 갈래?”라고 물었더니 광염군은
조금도 주저 없이 “메이저리그”라고 대답했다. (물론 아직 어려서 그렇지만) 확고한 결심이다.
여기서 한 가지, 그렇다면 미국에서 자란 소년이 메이저리그 선수로 성장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2010년 ‘북 오브 오즈(Book of Odds)’에 따르면 1만1,437명당 1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를 퍼센티지로 환산할 경우 0.00874%가 된다. 적어도 수치상으로 볼 때 메이저리거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내지는 ‘낙타가 바늘구명 통과’하기라는 말이 괜한 얘기는 아닌 셈이다. 게다
가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메이저리그가 세계화되면서 미국의 선수들은 아시아와 중남미 어딘가에 있을 얼굴모를 선수들과도 경쟁하는 글로벌시대를 맞았다. 경쟁은 갈수록 살벌해지고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을 확률은 점점 더 희박해지는 양상이다.
음악도 미술도 심지어 부모님이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지만 춤에도 관심이 없고 야구에만 몰두하는 아들이 너무 ‘마초스럽게’ 자라지는 않을까하고 부모가 걱정하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광염군은 음식을 만들 때 옆에서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늦둥이 셋째를 가진 엄마를 위해 자신이 설거지를하는 섬세하고 다정한 성격의 어린이다. 부모님과의 이메일 주고받기는 꼭 한글로 한다.
광염군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와 함께 생활해 미국 애들한테는 없는 효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말했다. 조부모가 다시 한국으로 역이민을 한 뒤 광염군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8살 나이에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서 두 달이나 지내고 왔다고 한다.
아들에게 ‘빛과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지어 준 광염군의 부모는 비록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해도, 혹은 하버드에 진학하지 못해도 아들이 지금처럼 착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만 하면 대만족이다
<박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