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부니 다홍치마 같던 단풍나무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지고, 화단의 나팔꽃과 다른 여름 꽃들은 시들어 버렸다. 몇개 안 되는 잎새가 달려 있는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빠른 세월의 냉혹함을 알려주고 있다.
가지 사이로 보이는 잿빛 하늘과 곧 떨어질 것 같은 담쟁이덩굴의 잎새를 보니 힘들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중환자들이 떠오른다.
쓸쓸한 뒷마당에서 유난히도 붉은 빛을 내는 꽃이 피었다. 몇년 전에 심은 동백꽃이다. 나는 겸손한 마음, 신중과 침착이라는 꽃말을 가진 동백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투병생활을 하시는 어머님도 이 꽃을 무척 좋아하신다.
벌, 나비가 날아다니지 않는 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의 꽃가루받이는 아주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있어 가능하다고 한다. 추운 겨울 적당한 먹잇감이 없는 동박새에게는 동백나무의 꿀이 더 할 나위없는 좋은 식량이라고 한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같이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싱싱해지는 동백의 선홍색은 신선한 피의 색깔이다. 우리 몸 모든 장기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피, 그 혈액의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의 세포들 중 어느 것 하나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혈액이 있음으로 우리의 오장육부는 생명으로 연결되고 존재하게 된다.
얼마 전 잘 아는 환자 한분을 뵈러 어바인 대학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수년 전에 간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성공적이지 못했었다. 몇 번의 항암 치료 후에 더 이상 효과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고민하던 환자의 부인은 본인의 간을 일부 떼어주는 이식을 결단하였다. 다행히 혈액형이 맞아 간의 일부분을 떼어줄 수 있었다.
두 분은 5년 정도 아무 문제없이 지냈으나 지난해 이식된 간에서 암이 다시 자라나는 것이 발견 되었다. 환자는 새롭게 시작된 항암 치료가 힘겹다고 하신다. 이번에도 합병증으로 입원을 하게 된 그는 “우리 집사람이 나를 놓아주지를 않아요. 이제는 할일도 다했고 살만큼 살았는데…” 하신다.
부인은 “나의 일부분인 당신이 오래 살아야지요. 그래야, 제가 좋지요!” 하시는데 그녀의 표정이 너무 정답고 간절하다.
그 애절한 말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있다. 그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거나 뭔가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혈관 수술을 하신 한 할머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이 쓸모없는 인간, 이렇게라도 살아야 합니까?” 수술 당일 할머니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수술 후 회복실에서 “할머니, 어서 일어나세요!” 하고 깨우니, 할머니가 눈을 뜨고 놀라신다. “여기가 어딥니까?” “할머니, 여기는 회복실이에요. 수술이 정말 잘 되었어요”라고 대답을 했더니, 할머니가 실망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수술이 잘 되었는데 왜 실망을 하시는 거지요?”라고 물으니 할머니의 대답이 의외이다. “김 선생, 나는 오늘 기분이 좋고 노래가 절로 나와 천국에 갈 걸로 기대했었는데, 다시 회복실로 굴러 떨어졌으니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할머니! 죄송합니다, 또 살려드려서… 살아계시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한다고 비관하지 마세요. 다른 일은 못해도 자식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수 있잖아요”
“아! 참, 내가 누워서도 기도는 할 수 있겠네요” 할머니가 동의하셨다.
모든 사람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 다른 존재가 필요로 하는 동백꽃처럼. 생산성이 없고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 되니까.
다른 꽃들이 피지 않는 추운 겨울에 동백새에게 꿀을 주고, 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붉은 동백꽃은 오늘도 피어나고 있다.
김홍식 내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