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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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가슴으로 하는 연주

2010-12-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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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김 뉴욕음악원 원장

예전에 가르치던 학생 중에 감수성이 무척 예민한 학생이 하나 있었다. 치과 대학원생이었던 그녀는, 나도 아직 학생이었던 지라 원래 학부생만 가르치기로 되어있던 학교 방침에도 불구하고, 뭔가 컴퓨터 시스템의 잘못으로 대학원생이었음에도 어쩌다 나하고 레슨을 하게 된 학생이었다. 남미계 출신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레슨 중 간간히 성가 곡들을 가지고 와서 레슨을 받기도 하곤 하였다. 매사에 긍정적이었으며 피아노 치기를 정말로 좋아했던 그녀는 늘 진지한 태도로 레슨에 임했으며 질문도 많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곡들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무척 망설이면서 악보 하나를 내미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척 치고 싶었던 곡이라며 내게 수줍게 내밀던 그 곡은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었다. 아직 초보자인 그녀가 치기엔 힘든 곡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알기에, 언젠가 꼭 쳐보고 쉽다며 아쉬운 마음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이미 그 학생의 열정에 많이 감동되어있던 터라 그녀에게 버거운 곡인 건 알지만 시도해 보기를 권유하였다. 나의 그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그날부터 정말 열심히 그 곡을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즉흥 환상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왼손과 오른손의 같이 치기가 테크닉적으로 까다로운 빠른 파트이며, 두 번째 부분은 아름다운 멜로디가 인상적으로 진행되는 느린 부분으로서 그녀는 특히나 이 부분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연습이 진행 될수록, 그녀는 좋아하던 이 부분을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 테크닉적인 면에만 치중해서 연습함으로써 전체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못 듣고, 못 느끼고 있는 연주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진전되지 않는 자신의 연주에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하루는 내가 직접 그 부분을 쳐주었다. 말로써는 이미 내가 설명을 다 해주었음에도 여전히 비슷한 되풀이를 계속하고 있는 그녀가 좋아하던 그 멜로디를 다시 느끼기를 바라며.


다 치고 뒤를 돌아보자 내 조금 뒤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코가 빨개진 채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이었다. 때로는 학생들에게 100마디 말보다 한 번의 연주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줄 때가 있다. 그 후로는 별 진전이 없던 그녀의 즉흥 환상곡이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하였다. 음악 자체가 주는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낀 그날 이후로는 단 몇 번의 반복 연습을 하더라도 단순한 기계적인 반복 연습이 아닌 늘 음악적인 것을 염두에 둔 연습을 함으로써 그녀의 실력은 테크닉적인 면에서나 음악적인 면에서나 빠른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내게 레슨을 받던 학생 중 토니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토니는 비록 사정상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꼭 피아노를 전공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체계적으로 레슨을 받아본 적 없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거의 혼자 독학으로만 공부한 그의 연주는 온통 힘과 테크닉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었다. 체구가 컸던 토니는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를 피아노가 부서질 듯이 치며 엄청난 힘과 소리를 연주 내내 과시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팔 힘의 사용은, 그를 단 한 번의 전곡 연주로도 지치게 만들었으며, 레슨 중간 중간 쉬었다 계속하기를 반복하게 하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힘으로 치는 피아노를 구사하던 토니에게서 감수성을 끌어내어 힘이나 머리로만 하는 연주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연주를 더하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열정이 또한 대단하였던 토니는 이 어려운 과정을 잘 따라와 주었다. 수백 번의 서너 마디 반복연습을 하더라도 그 한번 한번에 다 의미를 부여하며 음악적인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반복 연습을 할 것을 꼭 지켜주었던 토니는 결국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진전을 보여 본인이 원하는 피아노과에 들어갔다.

연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그 모든 요소들이 다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연주자가 가슴으로 느끼면서 하는 연주가 아니라면 그 연주는 청중의 마음을 울릴 수가 없다. 내가 가슴 깊이 우러나와 하는 연주가 아닌 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까. 연주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닌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되어서 하는 것임을 학생들이 깨닫게 될 때 그들의 연주는 빠르게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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