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사하는 마음

2010-12-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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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추수감사절이 되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의료봉사를 다니는 바하 멕시코의 집단농장이다.

가을을 끝낸 저녁 고용농부들은 들녘에서 슬쩍 감춰온 도마도와 옥수수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굶주리며 기다리던 가족들은 거친 황토에 긁히고 터진 아버지의 손이 내민 소박한 ‘추수’를 받아들며 감사의 미소를 짓는다.

봄의 황량한 땅을 일구고,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린 후, 가을의 열매를 거두어드렸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추수를 끝내면 떠나야 한다. 겨울동안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따뜻하고 일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두꺼운 옷과 생필품을 전하고 황토 흙 묻은 머리를 깎아주거나 수백개의 컵라면을 끓여 나눈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금년에도 한 슬픈 가족을 만났다. 선천적으로 두 발과 한 손이 없이 태어난 불구의 아들과 그를 30년간 돌보고 있는 어머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져 왼쪽 쇄골에 골절이 생긴 것이다. 휠체어가 없어 쇠붙이를 용접해 만든 수레에 아들을 태우고 흙먼지 이는 황토 길에서 끌고 다니던 어머니였다.

진료소를 찾았지만 그들이 가진 돈, 5일간 농장에서 일해 받은 수당 50달러로는 진찰과 X-레이 촬영이 고작일 뿐 꼭 필요한 의료기구인 브레이스는 감당 할 수 없었다. 간단한 브레이스만 했어도 완쾌될 수 있었는데 돈이 없어 포기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왼쪽 손과 어깨를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들의 수레도 제대로 밀지 못하고 농장의 일감도 적게 받아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들 모자가 우리 의료봉사단 바하 힐링미션과 연결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치료비를 해결해 병원을 안내해주고 휠체어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덜어주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난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돕기 위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지만 우리의 적은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늘 뼈저리게 느낀다.

휠체어가 없어 얼기설기 이은 허술한 수레에 몸을 실은 아들, 브레이스를 감당 못해 완전히 어깨가 나가버린 어머니, 그들을 보며 잠시 미국의 ‘풍요’를 생각했다. 정부의 저소득층이나 노인의료보험을 ‘공짜’로 여기며 필요하지도 않은 의료품을 마구 남용하는 사람들…우리의 저편, 보이지도 들리지는 않는 곳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없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15년전 고교생인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 오지엘 갔었다. 아들은 그곳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곳의 삶을 보았다. 떠나기 전날 밤 아들에게 물었다. “너와 열악한 이곳에 사는 아이들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 대답도 내가 했다. "네가 잘나서 누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넌 미국에서 태어났고 저 아이들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우리 둘 사이엔 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철없는 나이였지만 당시 아들은 무엇인가를 느낀 듯 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에게 베풀고 싶다는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이 아들의 일생을 지배하기를 난 그때 마음속으로 빌었다.

추수감사절을 지내고 이제 다시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나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 죽어가는 생명을 구해주지도, 가난한 살림을 벗어나게도 못해주지만 그래도 내게 허용된 약간의 체력과 시간과 작은 두 손으로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덜 배고프게 도울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된 것을 감사해야지, 열매도 못 맺는 일을 벌인 우리에게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 좋은 주변을 가진 것을 감사해야지…


최청원 내과의사·바하 힐링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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