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2010-11-23 (화) 12:00:00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1945 - )
남가주에서는 겨울이 되면 누렇게 말라있던 산들이 푸르러진다. 여름내 한 방울도 안 내리던 비가 심심찮게 내리기 때문이다. 물이야말로 만물을 소생시키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삭막하고 메말라 숯이 돼버린 현대인들의 마음 위로 그대 물이 되어 찾아오신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 흐르는 물로 만나자. 다시는 불로 만나지 말자.
김동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