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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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2010-11-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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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더위로 엊그제까지 허덕였는데 어느 틈에 가을이 샛길로 돌아와 나를 저만치 앞질러 간다. 뒤돌아보니 마당 곁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마치 올 봄에 시집갔다가 친정에 돌아온 새댁의 다홍치마처럼 곱다.

가을기운이 완연한 11월 밤, 친구들과 노래를 불렀다. ‘좋은 이웃들’이란 남성 중창단을 통해 봉사활동도 하면서 노래한지 십 년이 되었다. 이번 가을엔 수개월 준비 끝에 ‘버클리 대학 한국어 프로그램’을 돕는 음악회로 꾸몄다. 공연장이 아늑하게 찼다.

’브라더스 포’의 화음을 흉내 내며 ‘Try to Remember’를 부를 땐 대학시절 낙엽을 밟으며 걷던 덕수궁 돌담길이 생각나 행복했다. 정지용의 ‘향수’를 부를 땐, 관중들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보았다. 고향의 실개천 흐르는 넓은 벌을 떠올리듯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이들의 손을 잡고 동산에 올라 ‘얼룩배기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우는 소리’를 들었다.


중창단의 원이 아우가 채보한 ‘기러기 떼’를 부르면서 나는 얼굴 한번 못 본 외삼촌을 생각했다. 원산중학 졸업반이던 그는 6.25때 인민군으로 끌려가 낙동강 전투에서 산화했다. “한 줌의 흙이 바람에 흩날리듯/ 수많은 목숨 앗아가던 총탄자국이/ 산허리를 수 놓아둔 채 말이 없는데/기러기 한 떼 줄지어간다/ 찬 서리 하얀 저 산 너머로/기러기 떼 줄지어난다”

이젠 중년의 노후 돼가는 성대 탓인지 노래 끝이 처지고 음이 자꾸 떨려온다. 호흡도, 발성도 한 사람이 하듯 되지 않아 서로 애를 쓰다가 웃고 만다. 특히 요즘 곡들은 엇박자가 많아 빠른 곡을 할 때마다 진땀을 흘린다. 지도선생을 따로 모실 형편도 못되고, 각자 생업이 있는 여섯 명 아마추어들이 노래 좋아하는 객기 하나로 모인 터라 허점이 많다. 그나마 관중들 대부분이 우리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민 1세들이어서 그들의 애정 어린 공감대가 큰 힘이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마침 곡으로 관중들과 함께 불렀다. 뜨거운 가슴을 안고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우리 실력에 과분한 박수와 성원이 느껴져 온다. 그 때, 평소 존경해 온 C장로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본 후 그 자리에 잠시 머무세요.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뒤에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을 자막에서 읽으세요. 감동이 클수록 관객들은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작품을 만든 이들을 기억하고 싶어 한답니다. 그것이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의 참 뜻이지요.”

‘좋은 이웃들’을 위해 뒤에서 수고한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무보수 반주자에서부터 영상 비디오를 만들어준 우리 2세, 후원금을 기부하신 분들, 그리고 총괄 매니저의 숨은 노고가 컸다. 또한 옛 멤버들의 후광도 큰 도움이었다.
내 삶에 도움을 주었던 ‘엔딩 크레딧’ 이름들을 생각하면서, C장로님의 뼈아픈 당부를 다시 음미해 본다. “당신의 작품에 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당신이 남의 엔딩 크레딧에 드는 것입니다. 당신이 남의 인생에 빛도, 이름도 없이 그를 돋보이게 하는 후원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후반전 인생의 길이요, 우리가 나이 들면서 불러야 할 ‘가을의 노래’입니다.”


김희봉 / 환경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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