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2010-11-0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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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최승자(1952 - )


성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누군지 모를 너를 감싸 적시는 그 관능의 수액이 죽음으로부터 발원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가르쳐주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교의 의식처럼 무겁고 음산하게조차 느껴진다. 삶과 죽음, 외설과 예술, 문명과 어두운 피, 금욕과 쾌락은 그렇게 뿌리를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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