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텔레비전

2010-10-26 (화) 12:00:00
크게 작게
초인종이 울리고, 문득
그녀가 돌아왔다 저녁을 차려준다
오똑한 콧날 약간 붉은 금발
그녀는 샤워를 한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낸다 계란 프라이를 한다
전자 레인지에서 데워진 밥을 꺼낸다
국을 데워 그릇에 담는다
창가에 노란색 방범등
숟가락을 꺼내 식탁에 놓는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의자에 앉는다
튼튼한 의자와 그녀의 넓은 이마
인형 같은 그녀는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서정학(1971 - )



화자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 여자를 보고 말하는 것인지, 텔레비전이 화자가 돼 현실 속의 한 여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속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화자가 그녀를 보는 시각이 텔레비전과 현실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단절돼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처럼 일상을 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오늘 저녁 우리의 부부, 혹은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현대판 우화다.


김동찬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