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여자중학교의 가정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 전에 준비물을 챙기는데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중간 굽이 있는 빨간 가죽 슬리퍼였다. 여선생님들이 교내에서 실내화를 신은 것을 본 지라 여교사의 필수품이려니 하고 큰맘 먹고 명동의 양화점에서 마련한 것이다.
학생들도 동료교사들도 예쁘다며 칭찬을 하고 내 별명은 ‘빨간 구두 선생님’이 되었다. 한 달 여쯤 지나자 교무주임 선생이 신임교사를 소집한다.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을거라는 귀띔이어서 단정히 하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이 조목조목 지적을 한다. 긴 생머리가 학생인지 선생인지 구별이 안 되니 퍼머를 하라는 분부가 나를 향한 것이었고, 우리나라는 아직 전시체제이므로 전시의 국민들은 슬리퍼를 한가하게 끌고 다녀선 안 된다며 내 발을 보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78년도에 전시체제라니 이해불가였지만 이북 출신 또순이 여교장 선생님에겐 통일이 안 된 나라의 상황이 전시로 생각되었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여교사를 보다 못해 그런 자리를 마련하신 듯 싶은데, 그땐 사회인이 되어서도 왜 그런 제약을 받아야하나 야속했다. 별 수 없이 머리는 펌을 하고 실내화는 학생들과 같은 하얀 운동화로 바꾸었다. 30년전 이야기인데도 엊그제 일처럼 섭섭하다. 평소 구두를 좋아하는 내가 구두 때문에 받은 핍박이어서 그럴 것이다.
며칠 전 동인집의 북사인회가 있었다. 북사인회 준비로 여러가지 물품 준비도 해야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하건만, 나는 구두를 샀다. 아주 높은 킬 힐이다. 남들이 보면 “윗쪽 공기는 어떻수?”하고 물어볼만한 샌들이다. 키가 커 보이면 상대적으로 덜 퍼져보일 것이란 계산이었다. 당일 아침 미리 신고 연습을 하는데 너무 높아 삐끗하고 발목이 접혀져서 다쳤다. 그 신을 신어보기는커녕 발이 너무 부어올라 가장 낮은(굽이 아예 없는) 신발을 겨우 꿰고 참석하였다. 종일 발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인생은 이리 대책 없거나 더 불리한 쪽으로 종종 진행되곤 한다. 그러니 매사에 무리수는 두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다. 사람 잡는 신발이어서 킬 힐인 모양이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윤흥길 소설가의 오래전 소설제목이 생각난다. 내가 죽으면 ‘수십켤레의 구두로 남은 아줌마’가 될 정도로 신발이 많다. 오죽하면 남편이 나를 부를 때 종종 ‘임멜다 여사’라고 할까? 두 식구만 남은 집의 현관에 남편 신발 한 켤레면 내 신발은 열이다.
잘 알던 분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장의사에서 평소에 고인이 좋아하던 옷을 챙겨오라고 했다며 따님이 묻는다. 타주에 살던 고인의 딸은 엄마의 옷을 잘 모른다기에 집에 가서 즐겨 입던 옷을 찾아주었다. 그 옷과 매치하여 편한 신발도 들고 장의사에 갔더니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신발은 필요 없단다. 주검은 영원히 자는 것이므로 잘 땐 신발을 안 신는다나?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였다.
북 아메리카 인디안 수우족의 기도문 중 신발에 관한 금언이 있다. ‘남의 모카신을 신고 두 달 이상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는 말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라는 역지사지의 사상이 담긴 것이다. 이렇게 신발 하나에도 철학이 담길 수 있다.
죽을 땐 관 속에 넣어가지도 못할 신발, 생전에 실컷 신어봐야 하겠다. 조만간 이 핑계를 대고 나는 또 신발 한 켤레 살 것이다. 불황의 여파로 전시체제와 다름없는 요즘엔 아무래도 질기고 튼튼한 군화 같은 신발을 사야하려나? 홍교장 선생님의 어드바이스를 떠올리며.
이 정 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