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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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만난 헝가리 여인

2010-10-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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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늘 가슴이 찡하게 다가오는 여인이 있다. 나는 이민초기, 레지던트의 혹독한 수련기간에 이탈리안 계 주인집 이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낙엽의 향연이 시작되는 어느 가을날, 길 건너편에 사는 30대 중반의 헝가리 계 여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앤’이라고 소개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 마당으로 갔다.

작은집의 넓은 마당에는 포도넝쿨의 그늘아래 나무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고 감과 사과나무, 채소밭이 있는 시골집이다. 이 집은 앤의 아버지가 손수 지은 목조 집으로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의 초석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안내한 방에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에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의식불명의 노인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흰 앤의 어머니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남편의 손을 닦아내고 있었다.

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다진 야채와 고기를 넣은 양배추 쌈이 하나 가득 담긴 뜨거운 찜통냄비를 들고 우리 집에 들렀다. 푸짐하고 따뜻한 이민족의 헝가리 토속 음식 맛이었다. 그녀는 독일제 소형차를 종횡무진 몰고 다니며 나를 대신해 우리 아이 학교 PTA 모임에 참석하고 미 전역의 생생한 현지 뉴스 등을 날라다 주었다.


하지만 이민 초기,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다만 인공호흡기를 단 앤의 아버지를 방문해서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심장박동소리를 듣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의 박동소리는 마침내 멈추었다. 대가족과 친척들이 집에 모두 모였다. 내가 미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본 전통장례식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후 나는 직장을 옮겨 다니며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바람결 소문으로 그녀가 루프스(SLE)는 질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얼마 전에 나는 자동차를 몰고 앤의 집을 찾아갔다. 벨을 누르니 낯선 중년남자의 집주인이 나타나 그녀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핼로윈이 다가온다. 지금 앤이 내 곁에 있다면 뒷마당에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서 속을 파내고 도깨비의 얼굴을 새기고 그 안에 양초를 넣어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장식을 하며. 지난날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고국의 추석과 낯선 미국명절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디아스포라(Diaspora)의 방황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웃들은 높은 담장을 쌓고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

그래서 앤과 같이 집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로 왕래하면서 토속음식을 나누어 먹고 포도넝쿨 그늘아래 앉아 차를 마시던 그녀가 더욱 그리워진다.


박민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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