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 세미나를 가면 참석자의 대부분이 엄마들이고 아빠는 아주 가끔 눈을 비벼야 보인다. 어느 땐 한창 진행이 무르익어 교육의 끝 시간으로 치달을 때야 살그머니 들어와 뒷자리를 잡고 앉으시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안 듣는 척하기도 하며 귀를 쫑긋하시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다.
한 세미나에서 인상이 참 인자하던 한 아빠의 모습이 거의 5~6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청일점인 이유도 있지만 첫날 끝날 무렵에 오셨다가 다음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오셨으니 더욱 그렇다. 말도 없고 표정도 별로 변하지 않지만 정말 건드리면 톡하고 울음보를 터트릴 것 같은 맑은 눈으로 장애가 심한 다 큰 딸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그 딸을 자신의 멍에처럼 지고 있는 사랑스런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미안해 하는 마음이 눈에 비친다.
나는 어떻게 보면 남의 일이라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마구 성인 장애인을 위한 준비를 위해 부모가 얼마나 모진 마음을 가져야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는가를 설쳐대며 이야기 했다. 물론 내 말이 맞는 구석이 있기도 하고 공감까지 가는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일까 의심할 수도 있다.
성인 장애인인 딸은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아준 엄마의 손길에 먹는 것도, 흐르는 침을 닦는 것도, 가슴에 건 턱받이며 어디 가려운 곳 긁는 일도 모두 의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의 눈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안다. 머리를 긁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뭔가 불편한 소리를 내면 이리저리 편안한 방향으로 휠체어를 옮겨주기에 분주하다. 먹여주고 씻겨주고 휠체어를 미는 엄마는 그와 몸만 다른 한 개체의 사람이었다.
장애가 심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없는 딸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젠 옆에서 사라지면 허전해져 없어서는 안 되는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일까? 불같은 사랑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맹세와 함께 아내를 가족으로부터 빼앗듯 데리고 온 남편은 미안함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아내에게 성인 자녀를 떼어놓자고 말을 할 만도 한데 차라리 그냥 입을 굳게 닫고 만다.
좋은 아빠다. 부인을 사랑하고 딸을 가엽게 여기고 가정을 아끼며 성실히 살아가는 좋은 아빠다. 이혼을 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 학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말 성인군자 같이 좋은 아빠다. 늘 굳게 다문 입으로 가끔 부인에게는 좋은 사람 있으면 새로 시집가란 말을 한다.
성인 장애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렇게 좋은 아빠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글쎄 “Tough Love”로 표현하면 될까? 성인 장애인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 성인이 되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장애가 심할수록 부모가 앞장서 인생의 길을 함께 찾고 준비해야 한다.
좋은 그룹 홈을 찾아서 그 가정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어떤 음식을 준비해 주며, 그곳에 성인 장애인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 있는지 미리 알아보아 적응기간을 길게 두고 함께 떨어져 사는 훈련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아무 계획 없이 엄마와 아빠가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한다면 수족이 되어주던 부모를 잃는 순간부터 갑작스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이 성인 장애인에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그 좋은 아빠는 결국 성인 자녀를 내친다는 생각에 본인이 힘들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데리고 있기로 했을까? 아님 자신이 힘들어도 성인 자녀에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까? 늘 궁금하다.
좋은 아빠이기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전화하지 못하는 나도 특수교육을 하면서 겪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다.
김효선 <칼스테이트LA 교수>